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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12일 월요일

알제리 간략조사

아프리카대륙 북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Al-Jumh?r?yah al-Jaz?'ir?yah ad-D?muqr?t?yah ash-Sha'b?yah). 면적 238만 1740㎢. 인구 3281만 8000명(2003). 동쪽은 튀니지, 서쪽은 모로코, 남동쪽에서 남서쪽에 걸쳐 리비아·니제르·말리·모리타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알제.

알제리의 자연
알제리의 지형
크게 아틀라스산맥지역과 사하라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아틀라스산맥지역에는 좁은 연안평야, 해발고도 1000∼2000m의 험준한 산악줄기로 되어 있는 텔아틀라스산맥, 해발고도 500m의 아틀라스고원, 해발고도 1000∼2000m의 비교적 완만한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등이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늘어서 있다. 텔아틀라스산맥에는 유라시아지진대가 뻗어 있는데, 1980년 아스남에서 진도 7.5의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 사하라지역은 전체적으로 평균해발고도 500m 정도의 고원인데, 예외적으로 해발고도 3000m에 이르는 화산성이고 기이한 경관의 바위산 아하가르고원이 있다. 에르그라는 사구군(砂丘群)은 동부 대사구군 등 4곳에 있다. 북동쪽 끝에 있는 멜리르염호(鹽湖)의 해발고도는 해면 이하이다.

알제리의 기후
비는 겨울철에 많이 내리는데, 강우량은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많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매우 적어진다. 기후는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이 지중해성기후, 아틀라스고원에서 사하라아틀라스산맥까지가 스텝기후이고, 연강수량 200㎜인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 가장자리 이남은 사막기후이다.

모든 지역이 여름에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아 매우 덥다. 지중해 연안의 겨울은 온화하나 아틀라스산맥에서는 높은 산에 눈이 쌓일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 카빌리아산지 등 동부의 텔아틀라스산맥에서는 연강수량 1000㎜를 넘는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수량은 적고 큰 강도 없어서 농업·공업·도시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사하라아틀라스산맥에서 아틀라스고원에까지 다다른 사막화를 막기 위하여 <녹색 장성(長城)계획(Barrage Vert)>이라는 대규모 식림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계절풍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사하라에서 불어오는데, 모래가 섞인 뜨거운 바람 <시로코>는 유명하다.

알제리의 지리적 특색
지중해연안지역·스텝지역·사하라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중해연안지역은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자연조건이 가장 좋다. 식민지시대에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 와서 포도·감귤류 등을 재배하는 농원을 경영하고 여러 도시에 유럽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독립한 뒤 유럽인농원을 재편성한 자주관리농장 대부분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근대적 기계화 농업을 하고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정책에 의해 안나바·베자이아·스킥다·알제·아르주·오랑 등의 연안공업도시가 발전하였다. 수도 알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 집중이 계속되고 있고, 미치자평야는 농업지역에서 주택도시지역과 근교공업도시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내륙부의 콩스탕틴·사티프·메데아·아스남 등 주도에서는 지방공업화정책에 따라 공장·주택이 건설되고 있으며, 농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시나 프랑스로 빠져 나가고 있다.

스텝지역은 아틀라스고원과 사하라아틀라스산맥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연강수량 200~400㎜이며, 곡물 재배와 목축을 겸한 농업을 하고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해에는 목초를 찾아 이동하는 반(半)유목적 목축도 하고 있으며 일부 자주관리농장을 제외하고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고 빈곤한 지역이다. 관개농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호도나호(湖) 개발이 검토되고 있으며, 젤파·바트나 등의 주도에서는 공업화가 추진되고 있다.

사하라지역은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에 있는 사하라사막으로, 주민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산기슭·고원기슭이나 계곡바닥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산다. 오아시스에서는 샘물이나 지하수로를 통해서 얻는 물로 대추야자나 야채·과실 등을 재배한다. 농민들 가운데에는 노예로 쓰려고 남쪽에서 데려온 흑인이 많고, 물이 귀해서 물값이 비싼 데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아시스 주변을 근거지로 하는 유목민은 여름에는 가축을 데리고 북쪽의 농경지역으로 갔다가, 겨울에 오아시스로 돌아온다. 교통과 시장기능을 갖추고 있는 오아시스에는 시가지가 있으며 인구도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석유·천연가스가 개발되었고, 하시메사우드와 하시르멜에는 분리·송출 공장이 생겨 기술자와 노동자가 정주하고 있다.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가르다이아오아시스나 골레아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레강에는 프랑스의 핵폭발실험장이 있다.

알제리의 역사
구석기시대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화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남긴 원주민과는 달리,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마그레브지방의 고대 주민은 지중해인종에 속하는 베르베르인이고, 농경·목축을 영위하였다. 고대의 마그레브지방은 항해기술의 발달로 지중해 북쪽 연안과 동쪽 연안에서 온 페니키아·반달·비잔츠 등의 이민족에게 차례로 지배되었다. 그러나 지배자는 연안 여러 도시와 내륙부의 교통의 요지를 제압했을 뿐이었으므로, 베르베르인 각 부족의 정치·경제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중세에는 아랍인이 침공해 들어와서 아랍화·이슬람화의 시대가 되었다. 7세기 중엽 마그레브지방으로 침입한 아랍군은 8세기 모로코에까지 도달했다. 베르베르인은 여기에 저항했으나, 아랍군은 개종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했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아라비아어와 이슬람문화도 침투하여 혼혈현상이 진행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어도 베르베르어 및 베르베르문화를 고수한 부족도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카빌리아·아우레스·음자브(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각 지방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 초 알제리 연안에서 에스파냐군을 내쫓은 투르크군은 그대로 현지에 남아 이 고장을 오스만제국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이 시대 투르크총독의 지배영역 때문에 연안부에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지고 국가의 틀이 형성되었다. 총독부가 설치되었던 알제는 수도가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여러 부족의 조직은 유지되었으나 속령정치의 지배실권은 이곳에 주재하는 투르크육군·해군(해적)이 장악했다.

1830년 샤를 10세 치하의 프랑스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해군(해적)을 제압할 목적과 마르세유 대상인(大商人)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원정군 투르크총독을 항복시켜 알제를 점령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지배의 시작이었다. 이후 132년 동안의 식민지시대에, 프랑스지배에 대한 저항과 부족사회 해체 속에서 비로소 알제리인의 국민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압델 카데르와 모크탈의 거병에 의한 저항은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하인 알제리에서는 1870년대 포도 재배 성공을 계기로 감귤류·야채 등 유럽시장을 겨냥한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농원이 발전했다. 그 밖에 철과 아연광산도 개발되었으나 1차 생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식민지경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토지를 빼앗기고 전통적인 사회를 해체당한 알제리농민은 도시로 나가거나 농원노동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알제리인 700만 명에 유럽인 식민자(植民者)가 100만 명이었으므로 <동화정책>을 취하면서도 양자 사이에는 신분·소득면에서도 큰 차별을 두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하여 한때는 비시(Vichy) 정권 하에 들어갔는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으로 인해 C.A.J.M. 드골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른 프랑스식민지는 잇따라 독립했으나, 알제리독립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의 <세티프의 학살>과 같은 탄압이 계속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국민해방군(ALN)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1954년 11월 1일 FLN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봉기를 한 뒤, 7년 4개월에 이르는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정부는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나, 도리어 민중은 FLN쪽으로 결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58년 드골이 재등장하여 알제리의 민족자결권 승인을 원칙으로 하는 방침 아래, 1958년 9월 FLN이 수립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와의 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정전과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에비앙협정>이 성립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하여 그해 9월 제헌의회의 선거가 집행되었고, 의회는 민주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알제리의 정치·외교·군사
알제리의 정치
1963년 9월 헌법초안을 채택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M. 벤 벨라를 선출했다. 이듬해 4월의 FLN대회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신강령 <알제헌장>을 채택했다. 1965년 6월 19일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H. 부메디엔 대령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벤 벨라는 실각하고 유폐되었다. 부메디엔은 헌법을 정지시키고 혁명평의회를 최고기관으로 하고 스스로 의장에 취임했다. 대통령 벤 벨라는 유럽인 소유농지를 국유화했는데, 부메디엔도 사회주의노선을 취하여 외국계 기업을 차례차례 국유화했으며 대학·전문학교 출신 행정관을 중용하여 국영회사에 의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1971년 알제리인 소유농지를 재배분하는 <농업혁명>을 시작했다.

1966년 헌법 개정으로 의회는 상원 144명(임기 6년), 하원 380명(임기 5년)의 양원제가 되었다. 대통령은 강대한 권한을 가지며, 국가원수·국군최고사령관·국방장관을 겸하고 부통령·총리를 임명하며, 의원후보자를 지명한다(임기는 5년). 그리고 FLN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한다. 전국의 행정구는 32주, 160군, 704시·읍·면으로 되어 있고, 주와 시·읍·면에 각각 인민의회가 있다.

1976년 신헌법의 채택과 대통령선거 등의 민주화가 실행되고, 이듬해 국회선거가 실시되었다. 독립전쟁과 프랑스인 철수로 인하여 경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이 나라를 <중진국>으로 성장시킨 부메디엔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78년 병으로 사망하고 참모총장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1983년 3월 벤제디드정권은 최초로 총선거를 실시, 구세력을 일소하고 장기집권의 틀을 굳혔다.

한편, 1989년 2월 국민투표에서는 사회주의 단일정당 조항을 삭제하고,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이 승인되었으며, 1990년 6월 처음으로 실시한 복수정당제에 의한 통일지방선거에서 이슬람교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FLN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벤제디드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군병력의 수도권 장악으로 FIS의 위치는 전복, 군부에 대항하여 강경투쟁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유혈사태로 주민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1995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당선된 제루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기 전에 물러남에 따라 1999년 4월 대선에서 집권당 국민민주연합(RND)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승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8월 대통령이 지명한 각료들과의 불화로 내각이 일괄 사퇴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알리 벤플리스를 총리에 지명,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압델라지즈 뷰테플리카는 2004년 4월,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뽑혔다.

알제리의 외교
국제연합 비동맹 여러 나라의 리더이고,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외교 통로를 열어놓고 있으며, 1979∼1981년에 있었던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해결에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석유수출국기구(OPEC)·아랍연맹에서는 강경파이다. 2000년 3월 지중해권 비나토국가의 협의체인 <지중해대화>에 가입하였다.

알제리의 군사
군(軍)은 독립전쟁 이후 정치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해방군은 독립 뒤 인민국군(人民國軍)이라고 개칭하였다. 총병력은 육군 12만 명, 해군 6700명, 공군 1만 명(2002)이다. 2002년 국방비 지출액은 21억 달러였다.

알제리의 경제·산업
자원·농업·공업·무역·재정
석유·천연가스가 총수출액의 95%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석유 의존 경제이다. 석유매장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석유수출은 제한하고 국내에서의 가공을 중요시 하였다. 2003년말 원유매장량은 17억 9900만 ㎘로 그 해 산출량 6094만 ㎘를 감안하면 29.5년 동안 채취할 수 있다. 천연가스 수출을 위해 유럽과 잇는 파이프라인(튀니지 경유 이탈리아 노선과 모로코 경유 에스파냐 노선) 건설을 추진, 유럽연합의 천연가스 총수요의 25%를 공급한다. 2000년 천연가스생산량은 893억 ㎥였으며 259억 8100만 ㎥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수출하였다.

1960년대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1970년대에는 풍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해서 철강업·석유화학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국제경쟁력을 지닌 공업을 육성하지 못하고 국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하지 못했다. 농업은 취업인구의 24.4%(2000)를 차지하지만 GDP의 10%에 미치지 못한다. 곡물생산량도 250만 2000t, 경지 1㏊당 수확량 856㎏(2001)으로 저조하며, 곡물 자급율은 11%로 매우 낮다.

1985년 이후 석유값과 미국 달러의 하락에 의해 수출수입이 반으로 격감함에 따라 무역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가 누적하여 정부는 마침내 경제개혁에 나섰다. 생활 기본 물자에 대한 보조금이나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에 의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통화절하나 수입규제에 의해 무역수지 개선을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1994년 이후 대외채무의 상환 연장을 단행하고 세계은행·IMF와 협의하면서 진행시킨 경제재건에 의해 1997년에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었으나(수출 151억 9000만 달러, 수입 75억 9000만 달러), 1998년에 석유값이 내려 무역수지와 재정수지가 다시 적자로 전락했다. 1997년 12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석유항공 산업을 개방하였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738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400달러였다.

교통
전체길이 4017㎞인 철도는 거의가 식민지시대에 부설된 것으로,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도로 건설은 독립 뒤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1978년 사하라종단도로를 완공했다. 항공은 프랑스 각 도시로 노선이 연결되며, 20개 공항 가운데 8개가 국제공항인데, 국영회사인 알제리항공은 국내노선을 독점하고 있다. 항만으로서는 알제·오랑·아르주·안나바에 주요항구가 있다. 각 항구로부터 마르세유까지에는 정기 여객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알제리의 사회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고, 7세기 이후 아랍인이 들어왔다. 혼혈과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주민 가운데 아랍인이 80%, 베르베르인이 19%를 차지한다. 오늘날 베르베르인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베르베르계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베르베르인의 인구 비율은 18%이며, 주로 카빌리아·아우레스·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여러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도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하라의 오아시스에서는 흑인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인데, 식민지시대에 아랍어 사용이 금지되고 강제적인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2가지 언어를 쓴다.

독립된 뒤 의무교육 보급에 노력한 결과 1998년의 문맹률은 32%가 되었다. 중등·고등교육에서는 공업화와 관련해서 기술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독립 뒤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화하고 있고, 이슬람 강경파의 무슬림동포단이 있다. 의료는 무료화되어 있고, 다른 사회보장제도도 전진상태에 있다. 특히 노동자총동맹(UGTA)의 조직이 강하고, 노동자보호는 높은 수준에 있다.

알제리의 문화
베르베르문화·아랍이슬람문화·프랑스문화가 있는데, 사상·언어의 양면에서 7세기 이후 아랍이슬람문화가 알제리인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문화가 근대화의 중심이 되어 정치·경제·교육 등의 여러 제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는 프랑스문화의 영향이 크다. 독립된 뒤의 문학·영화도 프랑스어로 발표되어 왔다. 언어면에서는 베르베르어를 민족어의 1구성어로 삼은 이후에 아랍어화 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는데, 베르베르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학·영화에는 독립전쟁이나 베르베르인 풍토 속의 강인한 생활방식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알제리와 한국과의 관계
독립 이후 한국을 기피대상국가로 여겨왔으나, 1980년대로 접어들자 노선을 바꾸어 국제무대에서의 공개적인 반대표명은 자제하였다. 따라서 체육·경제분야의 정부인사들도 차츰 방한하게 되었고, 1985년 이후 한국과 경제협력 및 통상교류가 추진되어, 한국 민간회사가 알제리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건설사업에 합작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알제리로부터는 천연가스 도입계약을 맺었다. 2003년 대한수입액 1억 9165만 달러, 대한수출액 2억 2459만 달러이다. 2003년 체류자수 36명이다. 한국과는 1990년 1월, 북한과는 1958년 9월에 수교하였다.

알제리전쟁: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알제리전쟁: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노서경

머리말

알제리전쟁(1954-1962)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1) 막강한 해외 제국을 통치하는 서구 강대국과 그 힘과 논리에 종속되어 한 세기 이상 철저히 지배당한 약소민족 사이의 전면적인 대결이 알제리전쟁이었다.2) 그 전쟁은 전 날의 제국(帝國)인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1950년대 중반의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고, 비효율적인 기존의 제도를 버리고 근대화 작업에 나서야 했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전쟁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경위와 전쟁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인해 모든 국제정치와 모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원천적인 문제를 프랑스 사회에 제기했다. 알제리는 영국, 프랑스가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거느렸던 여러 지역의 여러 유형의 식민지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식민 지배세력에 의해 완전히 통합을 당해 이미 1848년 제2공화정기에 프랑스의 해외 도(道)로 전락한 존재였다.3) 따라서 1789년 혁명 이래 인간애와 보편주의를 주창해 온 프랑스 지식인은 인종과 종교와 문명이 다른 민족을 마치 브르타뉴와 알자스-로렌과 마찬가지인 듯 소유하고, 그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전쟁은 카빌(Kabyle)의 산악과 사하라 사막과 알제의 카스바(Casbah)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식민주의라는 서구 문명의 비이성적 원천이 지금 문제시되고 있음을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4) 알제리전쟁에서 소수이나 예리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의 교전(交戰) 상대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어쩌면 기이한 현상은 이러한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다.5)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반전 여론이 격앙되었고 미국 신문의 논필이 대단히 비판적이었어도 베트콩을 직접 지원하는 미국 지식인들의 행위와 언설은 있을 수 없었던 것과 비교를 해보면6)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알제리 사이에 상당히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프랑스 지식인과 알제리전쟁의 미묘한 밀착 관계는 1962년 종전으로 끝나지 않은 사실이다. 그 관계는 30년 또는 40년의 시간을 넘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지난날 보다 훨씬 확장된 형태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2000년 6월, 르몽드에서 한 알제리 여성이 전쟁기에 고문당한 것을 취재하여 보도한 것이 불씨가 되어 지난 수년간 알제리전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프랑스 신문과 방송, 화면을 덮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한 다양한 증언과 회상이 마치 봇물처럼 터졌고 이로써 프랑스 사회가 어떠한 주제들을 청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1차 연도의 주제로 살폈다. 참전 장병들의 심적인 부담, 프랑스군에 복무한 알제리인인 하르키와 그들의 후손들이 겪어온 갈등과 수난, 1961년 10월 17일 파리 시내에서 북아프리카인을 상대로 무차별하게 행사되는 공권력의 폭력 행위와 국가적 개입에 대한 논란, 알제리 민족해방의 실체인 FLN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부가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는 결국 식민주의로 인해 벌어진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성찰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가는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알제리전쟁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청산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방식에 의존할 문제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역사의 작업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7) 사실 2000년도 여름부터 직접 쟁점이 된 것은 전쟁기에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이었으며8) 전쟁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것은 별로 아니다. 그렇더라도 어떻든 식민 통치에서 일어난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가해와 피해의 절정이자 결산이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청산 작업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몫으로 양도된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의 정치와 프랑스의 지식인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착되어 있다는 미국 역사가 토니 쥬트의 명제의 적합성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대목이다.9) 2000년, 의회에 조사위를 설치하여 알제리전쟁에서 자행된 고문 행위를 재검토하자는 공산당 안이 부결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한 일시적 조사보다는 역사적이며 학구적인 작업을 통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프랑스와 알제리 양자의 선린 관계를 위해 보다 근본적이며 우선한다는 설명이었다.10) 이는 비시(Vichy) 정부 아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은 사안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사과한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며 따라서 당연시하기보다 마땅히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명을 위해서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알제리전쟁의 지적 청산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어떠한 계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또한 문제가 프랑스 내부에서만 발생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지중해 넘어 알제리에 결부된 만큼11) 이러한 지적 담론을 내어 놓는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이 얼마큼 사회의 반영인가, 아니면 반영이기보다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이 지식인가 하는 사회학자 아마드 사드리의 질문은 과거청산의 영역에 동원되어도 긴요하게쓰일 것이다.12)


1. 1950년대의 비판과 항의


이미 1952년에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북아프리카의 행진?에서 설명했고 다시 2차 세계대전 전쟁기의 상황만 별도로 연구되었듯이13) 북아프리카 민족주의는 2차대전의 참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대두했다. 알제리도 인구의 10분의 1인 유럽계가 토지와 생산 이윤의 절대 가치를 점령하도록 하고 10분의 9인 모슬렘은 법적으로 하등 인간 취급을 해 온 프랑스의 식민 정책이 변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다. 그들은 식민 종주국에 대해 일방적인 선의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군단의 피와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14) 그러나 1945년 5월 8일 세티프(S?tif) 시위에 대한 대규모의 진압작전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알제리 민중을 위한 쇄신책을 적용할 의사도 별로 없었고 지배에 물든 프랑스-알제리들의 사고방식을 흔들어 놓을 묘책도 없었다. 프랑스 국가의 입장에서나 일반적인 프랑스인들의 심성으로는 알제리가 별개의 독립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오직 프랑스를 훼손하고 음해하는 반국가적 발상이었다. 문명의 나라인 프랑스의 문화와 가치관에 동화되는 길만이 19세기에나 20세기에나 여전히 알제리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조건이고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반식민주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950년대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에서 어떠한 지식인이라도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15) 그 때문에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19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의 반식민주의적인 진술은 1950년대에 보아도 과감했고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알제리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의 계보는 1930년대를 지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가시적인 형태로 분명하게 형성되어 갔다.16) 2차대전 이후에도 파리 중심의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 알제리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고 1945년 세티프 봉기와 이에 대한 프랑스군의 진압작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식자층은 거의 감지하지 못했다.17) 오히려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일어난 것은 피에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알제리 현지의 사회계층 내부였다. 일부의 피에 누아르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직접 모슬렘들을 만나고 그들이 당하는 착취와 대가 없는 노동을 목격하고 또한 그들의 품격을 접하면서 모슬렘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성장했다. 소설과 에세이뿐 아니라 콩바(Combat)지를 통해 알제리를 부단하게 의식한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그러한 예로서 널리 알려진 경우이며 그러한 유형의 지식인은 카뮈 혼자일 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작가 쥴 루아, 역사가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전쟁 전과 전쟁기 내내 연구와 저술로 알제리 문제를 제기했다. 1954년 11월 1일 FLN 테러로 시작해서 1955년 프랑스 병력의 투입이 확대되고 1956년 2월 비상전권(Pouvoirs sp?ciaux)이 거의 만장일치로 본국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전쟁이 확실시되자 동시에 본국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긴급한 현안으로 알제리 정치범과 민주 인사들의 석방, 민주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해 알제리 민족운동의 거두 메살리 하지(Messali Hadj)의 감금을 해제하고 알제리에 민주화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에는 다양한 계열이 모였다. 이를 가리켜 제3세계주의(le tiers-mondisme)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시기의 진보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제인 약소국의 현실, 그들과 야소민족의 관계에 눈뜨면서 제시한 개념이었다.18) 클로드 리오쥐에 의하면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으로는 1945년 이후 형성되어도 이미 2차대전 이전에 공산당과 노조, 대학생들의 운동이 모두 식민지 문제에 주목했다.19) 알제리전쟁에 대한 1950년대의 비판적인 지식인 세계는 이처럼 일정한 노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앙드레 망두즈, 루이 마시뇽, 앙리 마루 같은 인사들처럼 가톨릭 지식인들이 전쟁 초기부터 시작하여 전쟁 이후까지 일관된 자세로 식민지의 현실을 분석하고 전쟁의 모순을 파헤친 것이었다.20) 프랑시스 장송망(網)은 좌파 지식인들이 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여 재판을 받은 유명한 사건이지만 기독교 사제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장송망을 지원하는 것은 신자가 아닌 가담자들에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가톨릭만이 아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할도 중요했다.21) 그러나 1958년 취임과 함께 알제리 독립의 방침을 취하는 드골 정부에 대해 폭력 행사로 맞선 OAS의 행태에서 보듯이 1950년대 지식인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과 비난은 강력한 극우의 적수를 만났다. 그것은 더구나 일반의 무관심에 포위된 외로운 소수였다.


2. 1990년대와 1950년대의 연속성과 변화

2000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뤼마니테에 나타난 12인 선언은 40년의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전쟁에 대한 항의의 정신이 당시의 당사자들에게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2인 선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며 거의 금기시되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활기를 띤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의 정신이 연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그것은 도구와 장치를 만나야 했다. 근래 수년간 수없이 쏟아져 나온 알제리전쟁에 대한 보도와 논평, 증언은 분명히 르몽드와 리베라씨옹, 뤼마니테 같은 좌파 언론이 주도했고 여기에 방송과 텔레비전이 영상을 통한 계속적인 보도로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22) 그러나 르몽드도 뤼마니테도 1950년대의 계승이란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주장과 그 표현의 매체 양면에서 1990년대와 1950년대에 어더한 연속성이 놓여 있느냐 하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필경은 인간의 권리라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오래된, 그러나 근래에 새롭게 강조되는 이념이 그러한 연속성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23)

하지만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에 관한 논의는 프랑스 지식층만의 독점적인 논의를 벗어났다.24) 1950년대에도 물론 알제리의 작가와 신문기자, 시인, 연극인들이 피식민지의 질곡에 갇혀 배우지 못하고 헐벗은 알제리 민중의 대의를 대변했다. 장 암루슈는 정복자가 과시하는 순전히 우발적인 우수성 앞에서 그것이 천성적인 우수성인 듯 굴복하는 피지배자의 의식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25) 그러나 고급 두뇌를 키워내기가 어려웠던 전쟁기에 비해 1970-80년대 북아프리카의 지적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활발해졌다.26) 문학과 사회학, 인류학 또 역사학 등 거의 모든 인문 사회분야에서 아랍 세계와도 다른 북아프리카의 독특한 풍토와 역사, 현실이 분석 규명되고 있다.27) 남아메리카 문학의 전성기에 이어 마그레브 문학은 1980년대부터 불어권 문화에 유럽인의 의식과 세계에서는 찾지 못할 풍성함을 공급하게 되었다. 벤 젤루운 같은 영향력 있는 대중 평론가와 타사디트 야신 같은 언어 인류학자의 활동은 알제리 전쟁기의 거장 작가들을 의식적으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자신과 동족(同族)이 속한 지식인과 민중의 심적이고 실질적인 어려움을 파고들고 대변하고 있다.28)

물론 이러한 지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착오에 가깝다. 자크 마르세유에서 보듯이 알제리에서 식민 모국인 프랑스가 이룩한 것에 대해 프랑스 지식인들이 잘못이 많았다고 회개(repentance)하는 것은 아니다.29)  ?식민주의 흑서?를 간행한 마르크 페로 같은 역사가는 프랑스 사회에서 식민 통치에 대해 지금 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30) 그것은 극히 일부 연구자들에 한정된 역사의식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식민지 시기와 전쟁기 또 그 이후에도 알제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고려하지 않던 식민주의적 인식은 1990년대에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알제리는 하나의 민족(nation)”이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가 나오는 것이 1956년이었고31) 어쩌면 기이한 이 기사의 제목은 그만큼 알제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에 의해 부인되고 있던 사실을 반증한다. 샤를- 앙드레 쥴리앙은 이 기사에서 민족을 형성하는 자연스러운 의식과 공동운명체의 감각을 알제리인들은 획득했고 이를 집요하게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규정해야 했다.32) 알제리전쟁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1970-80년대에도 그러한 인식은 거의 당연시되었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지식인의 담론과 사회의 인식에서 그같은 알제리 민족에 대한 부정은 사라졌다.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재판”을 알제리 역사가는 당당히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오기까지에는33) 사실은 알제리의 민중, 또 프랑스로 건너와서 하층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던 수많은 삶이 있었다.  

3. 이민자 도시빈민과 지식인

왜 이민 노동자라는 사회적 문제가 알제리전쟁 청산이라는 제한된 주제와 연결되어야만 하는가. 알제리인인 사회학자, 압델말레크 사야드는 여기에 명료하게 답을 내놓고 있다. 이민자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연장이다.34) 199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알제리 이민자는 60만명이 넘고 이 공식 숫자에 1947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인으로 등록된 알제리인을 포함하면 1백만 명이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이후로는 프랑스 노동력의 필수적 요소인 이민 노동자는 전체 인구의 7%이며 그 중에서 포르투갈인을 제외하면 알제리인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인구가 계속 급증하고 반면 취업의 가능성은 약한 알제리의 사회 현실이 사람들을 계속 몰아내고 있고 그들이 갈 곳은 프랑스이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상존한 낭테르 빈민촌의 상태는 벗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교외 보비니(Bobigny)와 누아지(Noisy)에도 일정한 기준의 주거와 공동체의 설비와 최소의 문화를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민자 문제는 프랑스 지식인이거나 알제리 지식인이거나 날이 갈수록 생각하게 되는 암적 현실이다.35) 유럽인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유럽중심주의, “나의” 역사만이 역사라는 사고의 기반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가를 알제리와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들은 정시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36)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 순종하고 동화되려고 하며 공격을 받지 않으려고 하지 눈에 띠고 구분되려고 하지 않는다.37) 그런데 극우적 세력이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바로 그들도 우리와 같을 수 있다는 모습이다. 산업계의 조건과 사회구조 양면에서 이민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러나 그들이 통합(int?gration 이 말은 식민지 시기의 동화assimilation에 대체해서 등장했다)되는 것도, 통합되지 않는 것도 모두 문제인 구조이다.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때로는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투쟁을 기울여야 하는 이민자 세계는 식민주의의 과거이며 현재이다. 알제리전쟁이라는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내 곁에 있는 지난 날 식민지인들이었다.38)


4. 1990년대 알제리 폭력에 대한 지식인의 대결 

이에 더해 1992년부터 알제리에서 일어난 격심한 정치적 폭력은39) 지중해 양안의 지식인의 의식을 날카롭게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유일정당에서 복수정당의 정치체제로, 군부 중심에서 민간 정치로 이행하려는 국가 건설이 세계적으로 드문 유혈을 빚고 있는 1990년대 알제리 사태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40)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근대화의 조건이라면 그러한 근대화는 거부하려는 이슬람 노선에 대해41) 민주주의 세력이 좌절하고 무참한 살해와 고문을 당하고, 무고한 주민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알제리 국가의 불투명한 입장과 대응 폭력의 문제 역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알제리 사태는 프랑스에서는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알제리인들이 이 가공할 폭력을 피해 안전한 장소를 찾을 곳은 프랑스뿐이고 이와 함께 알제리의 이념적 폭력이 곧바로 프랑스 땅으로 건너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위기감과 알제리의 자원을 의식해야 하는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가 90년대의 상황을 q상하게 주목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타사디트 야신은 이 폭력이 당대에 형성된 폭력이 아니라 발생학적인 계보를 갖고 있다고 식민지 시대와의 연결을 제기했다.42) 그것은 인류학자인 타사디트 야신의 독단적인 견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는 FLN의 내적 구조도 다시 보도록 이끌었고43) 반대로 알제리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도 강성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식민주의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지만 1990년대에 알제리의 도는 알제리 출신의 수많은 젊은 자가와 사회이론가들이 배출된 것은 폭력 앞에서 아연하기를 거부하고 이를 직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반대로 이러한 지적 각성에 대응하여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알제리역사와 정치에 관한 참고문헌을 의도적으로 출간하면서 그들은 위기에 대해 이렇게 대면하고 대결하자고 제언했다.        


맺음말


알제리전쟁을 주제로 한 프랑스의 과거청산 방식이나 양상은 사법적이거나 정치적이라기보다 분명히 지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소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지만 정치적인 방법만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시사한다. 폴 리쾨르가 명료하게 말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수난에 대해 방관하지 않는 지식인의 자세가 밑거름이었으며 또한 희생자와 사회 사이의 연대이며 다리였다. 적이 사방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알제리전쟁을 문제삼는 것은 당시에는 메아리 없는 외침 같았다. 사회당, 공산당, 노조, 공화좌파 그리고 일반국민 사이에서는 물론이며-지식인 내에서도 그들의 비판은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언과 행동은 다음 세대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남았고 후대는 앞서간 지식인들의 외로웠던 투쟁을 계승하고 확대했다.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 논의는 이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상속받은 바가 있고 그러한 증거를 어떠한 도구와 수단으로 찾아낼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만으로 그치게 되지는 않는다. 사회의 기층 노동은 이민자들에게 떠넘기고 많은 젊은이들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희망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알제리전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심각한 부정의는 양상을 달리하여 확대되고 있고 지식인들은 이 서구 백인 문명의 깊은 모순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제리에 대한 이러한 결산이라면 결산은 프랑스의 헤게모니의 유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직접적인 식민 지배 방식이 퇴조했어도 프랑코폰(francophone)이라는 유연한 개념을 창출하여 강력한 지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국가의 존재는 충분히 살아남았다.44)

<출처: 역사와 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1) 프랑스는 알제리전쟁에 전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않고 전쟁 발발 후 40여 년 간 공식적으로는 질서유지작전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의 문제와 역사는 그 전쟁이 얼마나 착잡하고 양자 사이에 괴리감이 깊었는가를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거일 것이다. 1999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의회는 알제리전쟁이라는 이름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된다.



2) 영국 역사가 마이클 케틀은, 프랑스인은 누구라도 알제리전쟁에 대한 공정한 역사를 쓸 수 없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알제리전쟁사로는 다음의 저술을 들 수 있다. Alistair Horne, Algerian War, Michael Kettle, De Gaulle and Algeria, 1940-1960, Quartet Books ; Hartmut Elsenhans, La IVe R?publique et la guerre d’Alg?rie(traduit),


3) 그러나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이 시작된 이래 에미르 압델-카데르를 지도자로 알제리의 주요한 전사(戰士) 부족들은 50년간 항쟁을 지속했으며 이러한 19세기 역사는 최근 알제리에 있는 알제리 역사가들에 의해 특히 주목받고 있다.


4) 대표적으로 Jean-Paul Sartre, Situation VI; Raymond Aron, La trag?die alg?rienne; Albert Camus, Chronologe alg?rienne.


5)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지를 편집한 프랑시스 장송과 수십 명의 지식인, 노동운동가, 예술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FLN의 자금 운반책이 되고 요원들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여권을 위조하는 활동을 벌였다. 당시의 경위와 가담자들의 회고는 Francis Jeanson, Alg?rie hors la loi; Jacques Charby, Les porteurs d’espoir, La d?couverte, 2004.


6) 베트남전쟁기의 미국과 알제리전쟁기의 프랑스 학계 및 언론을 비교한 미국 학위논문.


7) 2000년 10월 뤼마니테에 발표된 12인 선언


8) 고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Hafid Keramine, La pacification, Livre noir de six ann?es de guerre en Algerie, La cit? ?diteur, Lausanne, 1960. 전체에 주목하게 된다.


9) Tony Judt, Past imperfect. French Intellectuals, 1944-1956,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10) Ecrire l’histoire commune par Fran?ois Loncle, Pr?sident de la commission des Affaires ?trang?res de l’Assembl?e nationale, Lib?ration, mardi 24 juillet 2001.


11) 프랑스와 알제리 두 사회의 문제이지만 어떻게 보면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파리 중심의 비판적 지식인 세계가 있고 알제리 자체에서 양성되어 프랑스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와 언론인, 문학가들이 있고 그런가하면 액스앙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등 남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 알제리를 여전히 별개이기 보다 하나인 듯 간주하는 관점이 유력하다. 


12) Ahmad Sadri, Max Weber’s Sociology of Intellectuals,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33-37.


13) Charles-Andr? Julien, L’Afrique du nord en marche, Alg?rie-Tunisie-Maroc 1880-1962, Omnibus, 2002, pp.235-292; Christine L?visse-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Albin Michel, 1998.


14) 이러한 전쟁과 민족주의의 상호 영향은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긴밀하게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Gilbert Meynier의 노작을 보라. Alg?rie r?v?l?e, La guerre de 1914-1918 et le premier quart 여 XXe 냗칟, Geneve, Librarie Droz, 1981.


15) 프란츠 파농의 저서에 서문을 쓰고 또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해 소유한 것이 없으므로 상실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16) 연합군이 알제리 해안을 지중해 작전의 거점으로 정했고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역시 알제리 병력을 비롯한 아프리카 군단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모슬렘 알제리인들은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들의 권리 신장에 획기적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C. L.-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pp. 332-357.


17) Setif 봉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Annie Rey-Goldzeiger, Aux origines de la guerre d’Alg?rie 1940-1945, La d?couverte, 2002.


18) Jean-Pierre Biondi, Les anticolonialistes(1881-1962), Robert Laffont.


19) Claude Liaizu, Aux origines des tiers-mondisme, L’Harmattan, 1982. 


20) Andr? Mandouze, France Observateur, 1959. “진실로 조국을 배신하는 자는 누구인가”하고 그는 그를 배신자로 비난하는 측에 반문한다.


21) Geoffrey Adams, The Call of Conscience. French Protestant Responses to the Algerian War, 1954-1962,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Canada), 1998; Ren?e B?darida, La gauche chr?tienne et la guerre d’Alg?ire, in La guerre d’Alg?rie et les chr?tiens, Cahiers de l’IHTP, 9, octobre 1988. sous la direction de Fran?ois B?darida et Etienne Fouilloux


22) 알제리전쟁의 영상화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나왔고(Philip Dine, Images of the Algerian War, French Fiction and Film, 1954-1992, Clarendon Press, Oxford, 1994). 프랑스 대학의 미간행 학위논문들도 이 분야를 다루었다.  


23) 2004년에 새로 편집 간행된 Les droits de l’homme를 보라.


24) 일간지 르몽드에 의해 2000년에 촉발되어 알제리전쟁 50년이 되는 2004년에 와서는 여러 부문에 걸친 연구들이 일대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Philip Bourdel, Le livre noir de la guerre d’Alg?rie, Fran?ais et Alg?riens 1945-1962, Plon, 2003; Mohammed Harbi, Benjamin Stora, La guerre d’Alg?rie 1954-2004 la fin de l’amn?sie, Robert Laffont, 2004; M. Harbi, Gilbert Meynier, Le FLN documents et historire 1954-1962, Fayard, 2004.


25) Jean El-Mouhoub Amrouche, Un Alg?rien s’adresse aux Fran?ais ou l’histoire d’Alg?rie par les textes(1943-1961), ?dition ?tablie par Tassadit Yacine, Awal/L’Harmattan, 1984.


26) 아랍 세계 전반에 걸쳐 대학생의 양적 증가와 학위 소유자가 대폭 늘었고 오히려 이들 고급인력의 유럽과 미국 이전이 문제이다. The Arab Brain Drain, ed. by A.B. Zahlan, Ithaca Press, London, 1981. 


27) 이민문제와 인권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드리스 엘 야자미는 마그레브 지식인의 주요한 잡지로, AWAL, Confluences, Horizons Maghrebins을 소개한다. 파리의 L’Harmattan 출판사, 남불의 Acte du sud 출판사 등에서 북아프리카 저술의 간행에 집중하고 있다.


28) 영어로도 번역된 Tahar Ben Jelloun, Hospitalit? fran?aise, Racisme et immigration maghr?bine, Editions du Seuil, 1997(1984); T. Yacine-Titouh, Chacal ou la ruse des domin?s aux origines du malaise culturel des intellectuels alg?riens, La d?couverte, 2001. 


29) 마르세유는 풍부한 화보 자료를 동원한 프랑스와 알제리의 서문에서 지리와 역사가 프랑스와 알제리가 협력하도록 운명지었다는 말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19세기의 프랑스인이 아니라 민족해방군(ALN)의 사령관이었고 알제리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이었음을 상기하고 알제리에 대해 향수도 만족감도 버리고 또한 회개의식도 없이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Fran?ais et Alg?rie, sous la direction de Jacques Marseille, Larousse, 2002, Pr?face.


30) Marc Ferro, Le livre noir du colonialisme,  2003.


31) Charles-Andr? Julien, Une pens?e anticoloniale, Positions, 1914-1979, Sindbad, 1980. "L’Alg?rie est une nation", Demain 26 avril 1956, 재수록.


32) C-A. Julien, 같은 기사.


33) OUAR Larbi, Le proces de l’imperialisme et de colonialisme francais, L’Algerie, bastion de la resistance, Entreprise nationale 여 Livre(Alger), 1986.


34)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suivi de l’entretien de Hassan Arfaoui, Editions Bouchene, 2002, p. 102


35) Alain Gillette, Abdelmalek Sayad, L’immigration alg?rienne en France,


36)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p.33.


37) T. Ben Jelloun, Hospitalite fran?aise.


38) Sujet et citoyennet?, Maghreb/Europe, Cahiers Intersignes, n° 8-9 automne 1994.


39) 많은 기록과 증언 중에서 예를 들면 화보집인 Michael von Graffenried, Journal d’Algerie 1991-2001, Editions Autrement, 2003.


40) 알제리의 국가 건설과 이념의 문제, 1990년대 상황에 대해 William B. Quandt, Between Ballots and Bullets, Algeria’s Transition from Authoritarianism,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8; Rachid Tlemcani, State and Revolution in Algeria, Westview Press, Colorado, 1986; Kay Adamson, Algeria, A Study in Competing Ideologies, Cassel, London & New York, 1998.


41) 그러나 FIS의 강경노선만이 이슬람 세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온건 개혁주의의 이슬람도 존재한다.


42) Tassadit Yacine, Is a Genealogy of Violence Possible?, Research of African Literature 30 no3, Fall 1999, pp.23-35.


43) G. Meynier, Histoire interieure du FLN 1954-1962, Fayard, 2002.


45) Alec G. Hargreaves, Mark Mckinnsy(ed.), Post-Colonial Cultures in France(Routledge, 1997).

알제리와 프랑스(기사)-배신자’의 고통을 인정하노라

2004년07월08일 제517호
‘배신자’의 고통을 인정하노라

42주년 맞은 알제리 독립이 남긴 과제…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에 협력한 알제리인들 집단 소송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7월5일 알제리는 독립 42주년을 맞이했다. 1962년 3월 ‘에비앙조약’의 결실로 같은 해 7월5일 획득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로써 알제리는 8년간의 전쟁과 132년(1830∼1962)간의 식민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는 기억의 생명’이라고 한 ‘시세로’의 말처럼, 기억이 역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엿보이는 알제리와 프랑스의 양상이 식민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눈길을 끈다.

“시라크는 비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 3월23일 열린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의 선거 유세.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은 연임을 꿈꾸던 부테플리카의 야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사진/ GAMMA)

2003년 3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알제리를 공식 방문했다. 당시 알제리의 언론들이 뽑은 주요 제목들을 살펴보면, 식민의 잔재와 화해 그리고 기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들을 엿볼 수 있다.

“수천명의 알제리인들, ‘비자! 시라크, 이라크를 위해 비토권! 시라크’라는 외침으로 시라크를 환영하다” “시라크,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들을 용서하고, 독립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을 경외심으로 대하자고 요청하다” “부트플리카 연임을 바란다” “음흉한 화해” 등.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은 대선에서 연임을 꿈꾸던 알제리 대통령 부트플리카의 야심이라는 설이 있었다. 결국 부트플리카는 지난 4월 대선에서 83%의 득표율을 얻어 재당선됐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갖는 정치·경제적 의미의 중요성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다. 사실 프랑스는 알제리 해외 시장경제의 24%를 차지하는 경제협력 1위국이다.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는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며, 지상의 엘도라도다. 그래서 시라크가 방문하는 그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엘도라도로 향하는 ‘비자’를 외치며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했다. 2002년 프랑스가 알제리에 발급한 비자는 18만3천건으로 집계된다. 민중학살이 한창이던 1990년대는 제외하더라도, 1980년대 연간 80만건 비자에 견주면 상당히 줄어든 수치다. 두 나라간 비자협정의 경직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 기간은 이라크 전쟁 직전 프랑스가 미국에 맞서 반전을 외치던 때라 반전 입장을 친아랍으로 해석한 알제리인들은 ‘아랍인의 친구, 시라크’라는 구호로 시라크를 대환영했다.

“알제리인들은 산타할아버지 시라크에게 작성했던 선물 목록을 찢어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트리 밑을 보았을 때, 거기엔 비자도 돈도 에어버스도 지네딘 지단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까.” 당시 알제리 일간지 <르마탱>은 이렇게 썼다. 비자, 일자리, 에어버스 그리고 부모가 알제리인인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으로 상징되는, 프랑스로 향하는 알제리인들의 희망은 받아들이고 싶지만 결코 받을 수 없는 꿈속의 선물이라는 얘기다. “시라크는 우리에게 비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그들의 아르키들을 데리고 왔다”라고 같은 신문이 쓰고 있다. 시라크가 알제리 방문길에 아르키 출신 프랑스 정치인 암라위 메카세라를 동반한 데 대한 묘사다. 메카세라는 현 프랑스 정부의 국방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알제리 출신으로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싸운 보병대 사무관이었다.


△ 4월10일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알제리인들.(사진/ GAMMA)

다른 식민지들과 굳이 구별한다면, 알제리는 단지 식민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프랑스령 국토화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에 부응하여 이주정책을 권장하면서 프랑스인은 물론이고 알제리에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에게 프랑스 국적을 부여하기도 했다.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을 ‘피에 느와르’라 부르긴 했지만, 알제리인들도 공식적으론 프랑스인으로 취급됐다. 따라서 식민지 시절 평범한 알제리 청년들은 프랑인들처럼 국방 의무를 지며 군사훈련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알제리 독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은 계속되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주축으로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독립 뒤 15만여 아르키 학살

알제리 독립전쟁(1954∼62) 당시 프랑스쪽에 가담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알제리 출신 군인을 ‘아르키’(Harki)라 부른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한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는 ‘배신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아르키라는 명칭은 좀더 일반화되어 쓰여지며, 그들의 가족이나 굳이 군인이 아니라도 같은 의도를 실행했던 일반인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유엔의 자료에 따르면 1962년 독립 직전 알제리에는 6만여명의 군인들을 비롯해 공무원이나 보충원 등 26만3천명의 아르키가 있었다. 그 가족들을 포함하면 거의 1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알제리의 무슬림 알제리인들의 총수가 800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132년간의 기나긴 점령의 역사로 짐작할 수 있다.

“알제리는 영원히 프랑스일 줄 알았다”고 당시 아르키들은 한탄했다. 어쨌든 1962년 3월 알제리의 독립을 기약하는 에비앙조약 체결 이후 가장 막막한 미래와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이 바로 아르키이다. 그들 중 소수가 프랑스로 떠났고, 미처 떠나지 못한 일부는 독립 알제리군에게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당시 FLN에 의해 학살당한 아르키가 15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키 학살은 알제리 독립을 승인한 에비앙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에 행해진 학살이라 ‘인권유린’과 결부된다. 아르키들은 당시 알제리에 주재하던 프랑스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아직도 아르키들은 공식적으로 알제리를 방문할 수 없다.


△ 알제리 빈민가의 아이들. 알제리 국민들에게 프랑스는 아직도 지상의 ‘엘도라도’다.
(사진/ GAMMA)

인권의 나라라고 널리 알려진 프랑스에서 알제리 전쟁 동안 프랑스쪽이 행한 ‘전쟁포로의 학대’와 더불어, 아르키 처리 문제는 프랑스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장이었다. “아르키는 과연 누구의 희생자들인가”라는 논란은 아직도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이슈다. 2001년에는 아르키와 그들의 가족에 의해 인권유린 명목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어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르키와 관련해서 진지한 논쟁이 또 한번 불거졌다. “프랑스를 돕다가 알제리 독립과 함께 비참하게 학살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하도록 방치한 프랑스의 책임”이라는 논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의 소송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에비앙조약 체결 뒤 프랑스의 무기 회수 명령으로 인해 자기방어가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프랑스쪽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준 것도 아니어서 학살당했다. 이후 프랑스로 호송됐던 아르키들조차도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인권이 유린됐다.” 이 소송에서 흥미로운 점은 원고쪽이 정작 학살을 강행한 알제리는 접어두고 그 화살을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알제리에는 아무 기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로 향해 외치는 인권 회복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도 나타냈다. 아르키 문제는 프랑스에선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에선 선뜻 논의하길 꺼려하는 터부에 속한다.

다행히 지난 6월11일 프랑스 국회에서는 “아르키의 노고와 고통을 인정한다”는 법이 통과됐다. 에비앙조약 이후 42년 만에 채택된 이 법안은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참여한 내국인들의 고통과 학살에 대한 대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일종의 ‘기억과 역사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려는 정치적 진전임은 분명하다.

역사적 과오 청산하는 법안

이 법안의 여파로 아르키에 대한 배상금 내역이 늘어났고, 그들의 자녀에 대한 특혜 정책도 부쩍 늘어날 전망이다. 프랑스는 식민 시절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싸운 전사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한다. 아울러 학교의 역사교육에도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숨진 식민지인들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내용을 첨가할 계획이다. 132년, 그건 알제리의 과거인 동시에 프랑스의 과거다. 진정한 화해의 역사란 그 역사에 얽힌 나라들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이뤄질 수 있음은 유독 알제리와 프랑스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명심해야 하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