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대륙 북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Al-Jumh?r?yah al-Jaz?'ir?yah ad-D?muqr?t?yah ash-Sha'b?yah). 면적 238만 1740㎢. 인구 3281만 8000명(2003). 동쪽은 튀니지, 서쪽은 모로코, 남동쪽에서 남서쪽에 걸쳐 리비아·니제르·말리·모리타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알제.
알제리의 자연
알제리의 지형
크게 아틀라스산맥지역과 사하라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아틀라스산맥지역에는 좁은 연안평야, 해발고도 1000∼2000m의 험준한 산악줄기로 되어 있는 텔아틀라스산맥, 해발고도 500m의 아틀라스고원, 해발고도 1000∼2000m의 비교적 완만한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등이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늘어서 있다. 텔아틀라스산맥에는 유라시아지진대가 뻗어 있는데, 1980년 아스남에서 진도 7.5의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 사하라지역은 전체적으로 평균해발고도 500m 정도의 고원인데, 예외적으로 해발고도 3000m에 이르는 화산성이고 기이한 경관의 바위산 아하가르고원이 있다. 에르그라는 사구군(砂丘群)은 동부 대사구군 등 4곳에 있다. 북동쪽 끝에 있는 멜리르염호(鹽湖)의 해발고도는 해면 이하이다.
알제리의 기후
비는 겨울철에 많이 내리는데, 강우량은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많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매우 적어진다. 기후는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이 지중해성기후, 아틀라스고원에서 사하라아틀라스산맥까지가 스텝기후이고, 연강수량 200㎜인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 가장자리 이남은 사막기후이다.
모든 지역이 여름에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아 매우 덥다. 지중해 연안의 겨울은 온화하나 아틀라스산맥에서는 높은 산에 눈이 쌓일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 카빌리아산지 등 동부의 텔아틀라스산맥에서는 연강수량 1000㎜를 넘는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수량은 적고 큰 강도 없어서 농업·공업·도시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사하라아틀라스산맥에서 아틀라스고원에까지 다다른 사막화를 막기 위하여 <녹색 장성(長城)계획(Barrage Vert)>이라는 대규모 식림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계절풍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사하라에서 불어오는데, 모래가 섞인 뜨거운 바람 <시로코>는 유명하다.
모든 지역이 여름에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아 매우 덥다. 지중해 연안의 겨울은 온화하나 아틀라스산맥에서는 높은 산에 눈이 쌓일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 카빌리아산지 등 동부의 텔아틀라스산맥에서는 연강수량 1000㎜를 넘는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수량은 적고 큰 강도 없어서 농업·공업·도시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사하라아틀라스산맥에서 아틀라스고원에까지 다다른 사막화를 막기 위하여 <녹색 장성(長城)계획(Barrage Vert)>이라는 대규모 식림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계절풍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사하라에서 불어오는데, 모래가 섞인 뜨거운 바람 <시로코>는 유명하다.
알제리의 지리적 특색
지중해연안지역·스텝지역·사하라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중해연안지역은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자연조건이 가장 좋다. 식민지시대에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 와서 포도·감귤류 등을 재배하는 농원을 경영하고 여러 도시에 유럽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독립한 뒤 유럽인농원을 재편성한 자주관리농장 대부분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근대적 기계화 농업을 하고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정책에 의해 안나바·베자이아·스킥다·알제·아르주·오랑 등의 연안공업도시가 발전하였다. 수도 알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 집중이 계속되고 있고, 미치자평야는 농업지역에서 주택도시지역과 근교공업도시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내륙부의 콩스탕틴·사티프·메데아·아스남 등 주도에서는 지방공업화정책에 따라 공장·주택이 건설되고 있으며, 농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시나 프랑스로 빠져 나가고 있다.
스텝지역은 아틀라스고원과 사하라아틀라스산맥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연강수량 200~400㎜이며, 곡물 재배와 목축을 겸한 농업을 하고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해에는 목초를 찾아 이동하는 반(半)유목적 목축도 하고 있으며 일부 자주관리농장을 제외하고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고 빈곤한 지역이다. 관개농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호도나호(湖) 개발이 검토되고 있으며, 젤파·바트나 등의 주도에서는 공업화가 추진되고 있다.
사하라지역은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에 있는 사하라사막으로, 주민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산기슭·고원기슭이나 계곡바닥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산다. 오아시스에서는 샘물이나 지하수로를 통해서 얻는 물로 대추야자나 야채·과실 등을 재배한다. 농민들 가운데에는 노예로 쓰려고 남쪽에서 데려온 흑인이 많고, 물이 귀해서 물값이 비싼 데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아시스 주변을 근거지로 하는 유목민은 여름에는 가축을 데리고 북쪽의 농경지역으로 갔다가, 겨울에 오아시스로 돌아온다. 교통과 시장기능을 갖추고 있는 오아시스에는 시가지가 있으며 인구도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석유·천연가스가 개발되었고, 하시메사우드와 하시르멜에는 분리·송출 공장이 생겨 기술자와 노동자가 정주하고 있다.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가르다이아오아시스나 골레아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레강에는 프랑스의 핵폭발실험장이 있다.
지중해연안지역은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자연조건이 가장 좋다. 식민지시대에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 와서 포도·감귤류 등을 재배하는 농원을 경영하고 여러 도시에 유럽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독립한 뒤 유럽인농원을 재편성한 자주관리농장 대부분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근대적 기계화 농업을 하고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정책에 의해 안나바·베자이아·스킥다·알제·아르주·오랑 등의 연안공업도시가 발전하였다. 수도 알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 집중이 계속되고 있고, 미치자평야는 농업지역에서 주택도시지역과 근교공업도시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내륙부의 콩스탕틴·사티프·메데아·아스남 등 주도에서는 지방공업화정책에 따라 공장·주택이 건설되고 있으며, 농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시나 프랑스로 빠져 나가고 있다.
스텝지역은 아틀라스고원과 사하라아틀라스산맥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연강수량 200~400㎜이며, 곡물 재배와 목축을 겸한 농업을 하고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해에는 목초를 찾아 이동하는 반(半)유목적 목축도 하고 있으며 일부 자주관리농장을 제외하고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고 빈곤한 지역이다. 관개농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호도나호(湖) 개발이 검토되고 있으며, 젤파·바트나 등의 주도에서는 공업화가 추진되고 있다.
사하라지역은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에 있는 사하라사막으로, 주민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산기슭·고원기슭이나 계곡바닥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산다. 오아시스에서는 샘물이나 지하수로를 통해서 얻는 물로 대추야자나 야채·과실 등을 재배한다. 농민들 가운데에는 노예로 쓰려고 남쪽에서 데려온 흑인이 많고, 물이 귀해서 물값이 비싼 데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아시스 주변을 근거지로 하는 유목민은 여름에는 가축을 데리고 북쪽의 농경지역으로 갔다가, 겨울에 오아시스로 돌아온다. 교통과 시장기능을 갖추고 있는 오아시스에는 시가지가 있으며 인구도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석유·천연가스가 개발되었고, 하시메사우드와 하시르멜에는 분리·송출 공장이 생겨 기술자와 노동자가 정주하고 있다.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가르다이아오아시스나 골레아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레강에는 프랑스의 핵폭발실험장이 있다.
알제리의 역사
구석기시대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화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남긴 원주민과는 달리,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마그레브지방의 고대 주민은 지중해인종에 속하는 베르베르인이고, 농경·목축을 영위하였다. 고대의 마그레브지방은 항해기술의 발달로 지중해 북쪽 연안과 동쪽 연안에서 온 페니키아·반달·비잔츠 등의 이민족에게 차례로 지배되었다. 그러나 지배자는 연안 여러 도시와 내륙부의 교통의 요지를 제압했을 뿐이었으므로, 베르베르인 각 부족의 정치·경제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중세에는 아랍인이 침공해 들어와서 아랍화·이슬람화의 시대가 되었다. 7세기 중엽 마그레브지방으로 침입한 아랍군은 8세기 모로코에까지 도달했다. 베르베르인은 여기에 저항했으나, 아랍군은 개종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했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아라비아어와 이슬람문화도 침투하여 혼혈현상이 진행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어도 베르베르어 및 베르베르문화를 고수한 부족도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카빌리아·아우레스·음자브(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각 지방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 초 알제리 연안에서 에스파냐군을 내쫓은 투르크군은 그대로 현지에 남아 이 고장을 오스만제국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이 시대 투르크총독의 지배영역 때문에 연안부에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지고 국가의 틀이 형성되었다. 총독부가 설치되었던 알제는 수도가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여러 부족의 조직은 유지되었으나 속령정치의 지배실권은 이곳에 주재하는 투르크육군·해군(해적)이 장악했다.
1830년 샤를 10세 치하의 프랑스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해군(해적)을 제압할 목적과 마르세유 대상인(大商人)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원정군 투르크총독을 항복시켜 알제를 점령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지배의 시작이었다. 이후 132년 동안의 식민지시대에, 프랑스지배에 대한 저항과 부족사회 해체 속에서 비로소 알제리인의 국민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압델 카데르와 모크탈의 거병에 의한 저항은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하인 알제리에서는 1870년대 포도 재배 성공을 계기로 감귤류·야채 등 유럽시장을 겨냥한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농원이 발전했다. 그 밖에 철과 아연광산도 개발되었으나 1차 생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식민지경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토지를 빼앗기고 전통적인 사회를 해체당한 알제리농민은 도시로 나가거나 농원노동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알제리인 700만 명에 유럽인 식민자(植民者)가 100만 명이었으므로 <동화정책>을 취하면서도 양자 사이에는 신분·소득면에서도 큰 차별을 두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하여 한때는 비시(Vichy) 정권 하에 들어갔는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으로 인해 C.A.J.M. 드골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른 프랑스식민지는 잇따라 독립했으나, 알제리독립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의 <세티프의 학살>과 같은 탄압이 계속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국민해방군(ALN)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1954년 11월 1일 FLN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봉기를 한 뒤, 7년 4개월에 이르는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정부는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나, 도리어 민중은 FLN쪽으로 결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58년 드골이 재등장하여 알제리의 민족자결권 승인을 원칙으로 하는 방침 아래, 1958년 9월 FLN이 수립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와의 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정전과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에비앙협정>이 성립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하여 그해 9월 제헌의회의 선거가 집행되었고, 의회는 민주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중세에는 아랍인이 침공해 들어와서 아랍화·이슬람화의 시대가 되었다. 7세기 중엽 마그레브지방으로 침입한 아랍군은 8세기 모로코에까지 도달했다. 베르베르인은 여기에 저항했으나, 아랍군은 개종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했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아라비아어와 이슬람문화도 침투하여 혼혈현상이 진행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어도 베르베르어 및 베르베르문화를 고수한 부족도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카빌리아·아우레스·음자브(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각 지방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 초 알제리 연안에서 에스파냐군을 내쫓은 투르크군은 그대로 현지에 남아 이 고장을 오스만제국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이 시대 투르크총독의 지배영역 때문에 연안부에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지고 국가의 틀이 형성되었다. 총독부가 설치되었던 알제는 수도가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여러 부족의 조직은 유지되었으나 속령정치의 지배실권은 이곳에 주재하는 투르크육군·해군(해적)이 장악했다.
1830년 샤를 10세 치하의 프랑스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해군(해적)을 제압할 목적과 마르세유 대상인(大商人)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원정군 투르크총독을 항복시켜 알제를 점령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지배의 시작이었다. 이후 132년 동안의 식민지시대에, 프랑스지배에 대한 저항과 부족사회 해체 속에서 비로소 알제리인의 국민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압델 카데르와 모크탈의 거병에 의한 저항은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하인 알제리에서는 1870년대 포도 재배 성공을 계기로 감귤류·야채 등 유럽시장을 겨냥한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농원이 발전했다. 그 밖에 철과 아연광산도 개발되었으나 1차 생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식민지경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토지를 빼앗기고 전통적인 사회를 해체당한 알제리농민은 도시로 나가거나 농원노동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알제리인 700만 명에 유럽인 식민자(植民者)가 100만 명이었으므로 <동화정책>을 취하면서도 양자 사이에는 신분·소득면에서도 큰 차별을 두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하여 한때는 비시(Vichy) 정권 하에 들어갔는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으로 인해 C.A.J.M. 드골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른 프랑스식민지는 잇따라 독립했으나, 알제리독립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의 <세티프의 학살>과 같은 탄압이 계속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국민해방군(ALN)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1954년 11월 1일 FLN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봉기를 한 뒤, 7년 4개월에 이르는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정부는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나, 도리어 민중은 FLN쪽으로 결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58년 드골이 재등장하여 알제리의 민족자결권 승인을 원칙으로 하는 방침 아래, 1958년 9월 FLN이 수립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와의 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정전과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에비앙협정>이 성립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하여 그해 9월 제헌의회의 선거가 집행되었고, 의회는 민주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알제리의 정치·외교·군사
알제리의 정치
1963년 9월 헌법초안을 채택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M. 벤 벨라를 선출했다. 이듬해 4월의 FLN대회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신강령 <알제헌장>을 채택했다. 1965년 6월 19일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H. 부메디엔 대령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벤 벨라는 실각하고 유폐되었다. 부메디엔은 헌법을 정지시키고 혁명평의회를 최고기관으로 하고 스스로 의장에 취임했다. 대통령 벤 벨라는 유럽인 소유농지를 국유화했는데, 부메디엔도 사회주의노선을 취하여 외국계 기업을 차례차례 국유화했으며 대학·전문학교 출신 행정관을 중용하여 국영회사에 의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1971년 알제리인 소유농지를 재배분하는 <농업혁명>을 시작했다.
1966년 헌법 개정으로 의회는 상원 144명(임기 6년), 하원 380명(임기 5년)의 양원제가 되었다. 대통령은 강대한 권한을 가지며, 국가원수·국군최고사령관·국방장관을 겸하고 부통령·총리를 임명하며, 의원후보자를 지명한다(임기는 5년). 그리고 FLN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한다. 전국의 행정구는 32주, 160군, 704시·읍·면으로 되어 있고, 주와 시·읍·면에 각각 인민의회가 있다.
1976년 신헌법의 채택과 대통령선거 등의 민주화가 실행되고, 이듬해 국회선거가 실시되었다. 독립전쟁과 프랑스인 철수로 인하여 경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이 나라를 <중진국>으로 성장시킨 부메디엔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78년 병으로 사망하고 참모총장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1983년 3월 벤제디드정권은 최초로 총선거를 실시, 구세력을 일소하고 장기집권의 틀을 굳혔다.
한편, 1989년 2월 국민투표에서는 사회주의 단일정당 조항을 삭제하고,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이 승인되었으며, 1990년 6월 처음으로 실시한 복수정당제에 의한 통일지방선거에서 이슬람교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FLN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벤제디드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군병력의 수도권 장악으로 FIS의 위치는 전복, 군부에 대항하여 강경투쟁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유혈사태로 주민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1995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당선된 제루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기 전에 물러남에 따라 1999년 4월 대선에서 집권당 국민민주연합(RND)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승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8월 대통령이 지명한 각료들과의 불화로 내각이 일괄 사퇴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알리 벤플리스를 총리에 지명,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압델라지즈 뷰테플리카는 2004년 4월,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뽑혔다.
1966년 헌법 개정으로 의회는 상원 144명(임기 6년), 하원 380명(임기 5년)의 양원제가 되었다. 대통령은 강대한 권한을 가지며, 국가원수·국군최고사령관·국방장관을 겸하고 부통령·총리를 임명하며, 의원후보자를 지명한다(임기는 5년). 그리고 FLN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한다. 전국의 행정구는 32주, 160군, 704시·읍·면으로 되어 있고, 주와 시·읍·면에 각각 인민의회가 있다.
1976년 신헌법의 채택과 대통령선거 등의 민주화가 실행되고, 이듬해 국회선거가 실시되었다. 독립전쟁과 프랑스인 철수로 인하여 경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이 나라를 <중진국>으로 성장시킨 부메디엔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78년 병으로 사망하고 참모총장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1983년 3월 벤제디드정권은 최초로 총선거를 실시, 구세력을 일소하고 장기집권의 틀을 굳혔다.
한편, 1989년 2월 국민투표에서는 사회주의 단일정당 조항을 삭제하고,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이 승인되었으며, 1990년 6월 처음으로 실시한 복수정당제에 의한 통일지방선거에서 이슬람교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FLN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벤제디드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군병력의 수도권 장악으로 FIS의 위치는 전복, 군부에 대항하여 강경투쟁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유혈사태로 주민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1995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당선된 제루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기 전에 물러남에 따라 1999년 4월 대선에서 집권당 국민민주연합(RND)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승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8월 대통령이 지명한 각료들과의 불화로 내각이 일괄 사퇴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알리 벤플리스를 총리에 지명,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압델라지즈 뷰테플리카는 2004년 4월,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뽑혔다.
알제리의 외교
국제연합 비동맹 여러 나라의 리더이고,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외교 통로를 열어놓고 있으며, 1979∼1981년에 있었던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해결에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석유수출국기구(OPEC)·아랍연맹에서는 강경파이다. 2000년 3월 지중해권 비나토국가의 협의체인 <지중해대화>에 가입하였다.
알제리의 군사
군(軍)은 독립전쟁 이후 정치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해방군은 독립 뒤 인민국군(人民國軍)이라고 개칭하였다. 총병력은 육군 12만 명, 해군 6700명, 공군 1만 명(2002)이다. 2002년 국방비 지출액은 21억 달러였다.
알제리의 경제·산업
자원·농업·공업·무역·재정
석유·천연가스가 총수출액의 95%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석유 의존 경제이다. 석유매장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석유수출은 제한하고 국내에서의 가공을 중요시 하였다. 2003년말 원유매장량은 17억 9900만 ㎘로 그 해 산출량 6094만 ㎘를 감안하면 29.5년 동안 채취할 수 있다. 천연가스 수출을 위해 유럽과 잇는 파이프라인(튀니지 경유 이탈리아 노선과 모로코 경유 에스파냐 노선) 건설을 추진, 유럽연합의 천연가스 총수요의 25%를 공급한다. 2000년 천연가스생산량은 893억 ㎥였으며 259억 8100만 ㎥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수출하였다.
1960년대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1970년대에는 풍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해서 철강업·석유화학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국제경쟁력을 지닌 공업을 육성하지 못하고 국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하지 못했다. 농업은 취업인구의 24.4%(2000)를 차지하지만 GDP의 10%에 미치지 못한다. 곡물생산량도 250만 2000t, 경지 1㏊당 수확량 856㎏(2001)으로 저조하며, 곡물 자급율은 11%로 매우 낮다.
1985년 이후 석유값과 미국 달러의 하락에 의해 수출수입이 반으로 격감함에 따라 무역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가 누적하여 정부는 마침내 경제개혁에 나섰다. 생활 기본 물자에 대한 보조금이나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에 의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통화절하나 수입규제에 의해 무역수지 개선을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1994년 이후 대외채무의 상환 연장을 단행하고 세계은행·IMF와 협의하면서 진행시킨 경제재건에 의해 1997년에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었으나(수출 151억 9000만 달러, 수입 75억 9000만 달러), 1998년에 석유값이 내려 무역수지와 재정수지가 다시 적자로 전락했다. 1997년 12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석유항공 산업을 개방하였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738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400달러였다.
1960년대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1970년대에는 풍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해서 철강업·석유화학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국제경쟁력을 지닌 공업을 육성하지 못하고 국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하지 못했다. 농업은 취업인구의 24.4%(2000)를 차지하지만 GDP의 10%에 미치지 못한다. 곡물생산량도 250만 2000t, 경지 1㏊당 수확량 856㎏(2001)으로 저조하며, 곡물 자급율은 11%로 매우 낮다.
1985년 이후 석유값과 미국 달러의 하락에 의해 수출수입이 반으로 격감함에 따라 무역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가 누적하여 정부는 마침내 경제개혁에 나섰다. 생활 기본 물자에 대한 보조금이나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에 의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통화절하나 수입규제에 의해 무역수지 개선을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1994년 이후 대외채무의 상환 연장을 단행하고 세계은행·IMF와 협의하면서 진행시킨 경제재건에 의해 1997년에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었으나(수출 151억 9000만 달러, 수입 75억 9000만 달러), 1998년에 석유값이 내려 무역수지와 재정수지가 다시 적자로 전락했다. 1997년 12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석유항공 산업을 개방하였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738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400달러였다.
교통
전체길이 4017㎞인 철도는 거의가 식민지시대에 부설된 것으로,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도로 건설은 독립 뒤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1978년 사하라종단도로를 완공했다. 항공은 프랑스 각 도시로 노선이 연결되며, 20개 공항 가운데 8개가 국제공항인데, 국영회사인 알제리항공은 국내노선을 독점하고 있다. 항만으로서는 알제·오랑·아르주·안나바에 주요항구가 있다. 각 항구로부터 마르세유까지에는 정기 여객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알제리의 사회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고, 7세기 이후 아랍인이 들어왔다. 혼혈과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주민 가운데 아랍인이 80%, 베르베르인이 19%를 차지한다. 오늘날 베르베르인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베르베르계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베르베르인의 인구 비율은 18%이며, 주로 카빌리아·아우레스·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여러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도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하라의 오아시스에서는 흑인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인데, 식민지시대에 아랍어 사용이 금지되고 강제적인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2가지 언어를 쓴다.
독립된 뒤 의무교육 보급에 노력한 결과 1998년의 문맹률은 32%가 되었다. 중등·고등교육에서는 공업화와 관련해서 기술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독립 뒤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화하고 있고, 이슬람 강경파의 무슬림동포단이 있다. 의료는 무료화되어 있고, 다른 사회보장제도도 전진상태에 있다. 특히 노동자총동맹(UGTA)의 조직이 강하고, 노동자보호는 높은 수준에 있다.
독립된 뒤 의무교육 보급에 노력한 결과 1998년의 문맹률은 32%가 되었다. 중등·고등교육에서는 공업화와 관련해서 기술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독립 뒤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화하고 있고, 이슬람 강경파의 무슬림동포단이 있다. 의료는 무료화되어 있고, 다른 사회보장제도도 전진상태에 있다. 특히 노동자총동맹(UGTA)의 조직이 강하고, 노동자보호는 높은 수준에 있다.
알제리의 문화
베르베르문화·아랍이슬람문화·프랑스문화가 있는데, 사상·언어의 양면에서 7세기 이후 아랍이슬람문화가 알제리인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문화가 근대화의 중심이 되어 정치·경제·교육 등의 여러 제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는 프랑스문화의 영향이 크다. 독립된 뒤의 문학·영화도 프랑스어로 발표되어 왔다. 언어면에서는 베르베르어를 민족어의 1구성어로 삼은 이후에 아랍어화 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는데, 베르베르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학·영화에는 독립전쟁이나 베르베르인 풍토 속의 강인한 생활방식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알제리와 한국과의 관계
독립 이후 한국을 기피대상국가로 여겨왔으나, 1980년대로 접어들자 노선을 바꾸어 국제무대에서의 공개적인 반대표명은 자제하였다. 따라서 체육·경제분야의 정부인사들도 차츰 방한하게 되었고, 1985년 이후 한국과 경제협력 및 통상교류가 추진되어, 한국 민간회사가 알제리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건설사업에 합작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알제리로부터는 천연가스 도입계약을 맺었다. 2003년 대한수입액 1억 9165만 달러, 대한수출액 2억 2459만 달러이다. 2003년 체류자수 36명이다. 한국과는 1990년 1월, 북한과는 1958년 9월에 수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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