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7월5일 알제리는 독립 42주년을 맞이했다. 1962년 3월 ‘에비앙조약’의 결실로 같은 해 7월5일 획득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로써 알제리는 8년간의 전쟁과 132년(1830∼1962)간의 식민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는 기억의 생명’이라고 한 ‘시세로’의 말처럼, 기억이 역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엿보이는 알제리와 프랑스의 양상이 식민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눈길을 끈다.
“시라크는 비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 3월23일 열린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의 선거 유세.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은 연임을 꿈꾸던 부테플리카의 야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사진/ GAMMA) |
2003년 3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알제리를 공식 방문했다. 당시 알제리의 언론들이 뽑은 주요 제목들을 살펴보면, 식민의 잔재와 화해 그리고 기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들을 엿볼 수 있다.
“수천명의 알제리인들, ‘비자! 시라크, 이라크를 위해 비토권! 시라크’라는 외침으로 시라크를 환영하다” “시라크,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들을 용서하고, 독립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을 경외심으로 대하자고 요청하다” “부트플리카 연임을 바란다” “음흉한 화해” 등.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은 대선에서 연임을 꿈꾸던 알제리 대통령 부트플리카의 야심이라는 설이 있었다. 결국 부트플리카는 지난 4월 대선에서 83%의 득표율을 얻어 재당선됐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갖는 정치·경제적 의미의 중요성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다. 사실 프랑스는 알제리 해외 시장경제의 24%를 차지하는 경제협력 1위국이다.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는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며, 지상의 엘도라도다. 그래서 시라크가 방문하는 그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엘도라도로 향하는 ‘비자’를 외치며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했다. 2002년 프랑스가 알제리에 발급한 비자는 18만3천건으로 집계된다. 민중학살이 한창이던 1990년대는 제외하더라도, 1980년대 연간 80만건 비자에 견주면 상당히 줄어든 수치다. 두 나라간 비자협정의 경직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 기간은 이라크 전쟁 직전 프랑스가 미국에 맞서 반전을 외치던 때라 반전 입장을 친아랍으로 해석한 알제리인들은 ‘아랍인의 친구, 시라크’라는 구호로 시라크를 대환영했다.
“알제리인들은 산타할아버지 시라크에게 작성했던 선물 목록을 찢어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트리 밑을 보았을 때, 거기엔 비자도 돈도 에어버스도 지네딘 지단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까.” 당시 알제리 일간지 <르마탱>은 이렇게 썼다. 비자, 일자리, 에어버스 그리고 부모가 알제리인인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으로 상징되는, 프랑스로 향하는 알제리인들의 희망은 받아들이고 싶지만 결코 받을 수 없는 꿈속의 선물이라는 얘기다. “시라크는 우리에게 비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그들의 아르키들을 데리고 왔다”라고 같은 신문이 쓰고 있다. 시라크가 알제리 방문길에 아르키 출신 프랑스 정치인 암라위 메카세라를 동반한 데 대한 묘사다. 메카세라는 현 프랑스 정부의 국방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알제리 출신으로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싸운 보병대 사무관이었다.
△ 4월10일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알제리인들.(사진/ GAMMA) |
다른 식민지들과 굳이 구별한다면, 알제리는 단지 식민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프랑스령 국토화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에 부응하여 이주정책을 권장하면서 프랑스인은 물론이고 알제리에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에게 프랑스 국적을 부여하기도 했다.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을 ‘피에 느와르’라 부르긴 했지만, 알제리인들도 공식적으론 프랑스인으로 취급됐다. 따라서 식민지 시절 평범한 알제리 청년들은 프랑인들처럼 국방 의무를 지며 군사훈련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알제리 독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은 계속되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주축으로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독립 뒤 15만여 아르키 학살
알제리 독립전쟁(1954∼62) 당시 프랑스쪽에 가담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알제리 출신 군인을 ‘아르키’(Harki)라 부른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한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는 ‘배신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아르키라는 명칭은 좀더 일반화되어 쓰여지며, 그들의 가족이나 굳이 군인이 아니라도 같은 의도를 실행했던 일반인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유엔의 자료에 따르면 1962년 독립 직전 알제리에는 6만여명의 군인들을 비롯해 공무원이나 보충원 등 26만3천명의 아르키가 있었다. 그 가족들을 포함하면 거의 1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알제리의 무슬림 알제리인들의 총수가 800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132년간의 기나긴 점령의 역사로 짐작할 수 있다.
“알제리는 영원히 프랑스일 줄 알았다”고 당시 아르키들은 한탄했다. 어쨌든 1962년 3월 알제리의 독립을 기약하는 에비앙조약 체결 이후 가장 막막한 미래와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이 바로 아르키이다. 그들 중 소수가 프랑스로 떠났고, 미처 떠나지 못한 일부는 독립 알제리군에게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당시 FLN에 의해 학살당한 아르키가 15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키 학살은 알제리 독립을 승인한 에비앙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에 행해진 학살이라 ‘인권유린’과 결부된다. 아르키들은 당시 알제리에 주재하던 프랑스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아직도 아르키들은 공식적으로 알제리를 방문할 수 없다.
△ 알제리 빈민가의 아이들. 알제리 국민들에게 프랑스는 아직도 지상의 ‘엘도라도’다. |
인권의 나라라고 널리 알려진 프랑스에서 알제리 전쟁 동안 프랑스쪽이 행한 ‘전쟁포로의 학대’와 더불어, 아르키 처리 문제는 프랑스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장이었다. “아르키는 과연 누구의 희생자들인가”라는 논란은 아직도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이슈다. 2001년에는 아르키와 그들의 가족에 의해 인권유린 명목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어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르키와 관련해서 진지한 논쟁이 또 한번 불거졌다. “프랑스를 돕다가 알제리 독립과 함께 비참하게 학살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하도록 방치한 프랑스의 책임”이라는 논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의 소송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에비앙조약 체결 뒤 프랑스의 무기 회수 명령으로 인해 자기방어가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프랑스쪽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준 것도 아니어서 학살당했다. 이후 프랑스로 호송됐던 아르키들조차도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인권이 유린됐다.” 이 소송에서 흥미로운 점은 원고쪽이 정작 학살을 강행한 알제리는 접어두고 그 화살을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알제리에는 아무 기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로 향해 외치는 인권 회복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도 나타냈다. 아르키 문제는 프랑스에선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에선 선뜻 논의하길 꺼려하는 터부에 속한다.
다행히 지난 6월11일 프랑스 국회에서는 “아르키의 노고와 고통을 인정한다”는 법이 통과됐다. 에비앙조약 이후 42년 만에 채택된 이 법안은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참여한 내국인들의 고통과 학살에 대한 대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일종의 ‘기억과 역사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려는 정치적 진전임은 분명하다.
역사적 과오 청산하는 법안
이 법안의 여파로 아르키에 대한 배상금 내역이 늘어났고, 그들의 자녀에 대한 특혜 정책도 부쩍 늘어날 전망이다. 프랑스는 식민 시절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싸운 전사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한다. 아울러 학교의 역사교육에도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숨진 식민지인들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내용을 첨가할 계획이다. 132년, 그건 알제리의 과거인 동시에 프랑스의 과거다. 진정한 화해의 역사란 그 역사에 얽힌 나라들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이뤄질 수 있음은 유독 알제리와 프랑스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명심해야 하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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