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1월 28일 수요일

인재 킬러형 관리자의 7가지 유형

인재 킬러형 관리자의 7가지 유형  



인적 자원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실력을 키워주고, 열정을 고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 중심 축이 바로 관리자들이다. 강한 인재를 길러내는 관리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인재를 망치는 인재 킬러형 관리자도 많다. 이에 대해 살펴본다.

기업들의 인재 유치 노력이 그 어느 때 보다 강도 높게 전개되고 있다. 치열한 시장 점유 경쟁을 하듯 기업들의 인재 유치 활동이 공격적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Talent War’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인재 확보 노력은 일류 기업으로 향하는 출발점인 만큼 최우선해야할 경영의 핵심 과제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기업이 인재를 확보하고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좋은 사람을 유치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재 유치는 시작일 뿐이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키워주고, 동기부여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된 결정적인 핵심 동인이 바로 관리자들이다. 관리자들 중에는 부하의 능력을 잘 키우고 열의를 복돋아 주어 최고의 인재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어렵게 유치한 인재를 망치는 인재 킬러형 관리자들도 있다. 그 몇 가지 대표적인 유형과 특징들을 보자.


독선적 권위형

인재를 약화시키는 대표적인 관리자의 모습으로는 우선 독선적 권위주의형을 꼽을 수 있다. 이 경우 대개가 귀족 의식이 매우 강하고, 자신의 뜻대로 일이 안되면 부하들에게 쉽게 화를 내거나 지위적 권위로 억압하는 특징을 갖는다. 이런 관리자 밑에서는 직원들이 상사를 무서워 하고 주눅이 들어, 창의성이나 일에 대한 열정이 발휘될 없다. 단지 상사가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일할 뿐이다.

권위의식이 강한 관리자의 더 큰 문제는 아랫 사람들과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자신의 의견에 대한 부하들의 반론이나 비판을 진지하게 듣고 수용하는 면이 매우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하 직원들이 상사에게 좋은 것만 이야기 하고 나쁜 정보는 감추게 되는 커뮤니케이션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 관리자의 열린 커뮤니케이션 행동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나 잠재력을 이끌어 내는 중요한 동기부여 요인이다. 개인이 하고 싶은 말이나 의견을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금전적 보상에 버금가는 동기부여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리자들의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행동은 종업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결과적으로 인재들을 떠나게 만드는 커다란 인재 파괴 요인일 수 있다.

고대 중국 제왕들의 성패 사례가 좋은 교훈을 준다. 초대 당나라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종은 신하들이 범접하기가 어려운 매우 위엄이 있는 인상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제위 초기에 신하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상하간의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태종은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신하들과 자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노력을 했다. 또한 누구라도 하고 싶은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열린 분위기를 만들고, 좋은 간언(諫言)을 하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내려 용기를 복돋아 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훌륭한 인재들이 주변에 많이 모여 등용될 수 있었다. 반면, 대표적인 폭군으로 평가되는 수나라의 양제는 매우 독선적이고 신하의 간언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신하들은 모두가 왕을 두려워하고 충언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 결과 인재들은 모두 떠나고, 패망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참고: ‘중국 고사에서 배우는 제왕학’).

일류 기업들의 중요한 특징중 하나는, 관리자들이 직원들과 열린 의사소통을 통해 그들의 잠재력이나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개방적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강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메모리 분야에서 비메모리 반도체의 강자로 변신하여 성공한 인텔의 근본적인 강점도 바로 열린 커뮤니케이션 문화에 있었다. 비메모리 분야로 사업 방향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전략적 의견은 먼저 밑으로부터 강하게 제기 되었고, 이러한 주장이 임직원들간의 열띤 토론을 거쳐 최고경영자에게 수렴되어 전략 변화로 연결된 것이다. 구성원들이 서로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건설적인 논쟁이나 대화를 나누고, 이로부터 해법을 찾는 건강한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눈에 보이지 않은 핵심 역량이었다. 월마트의 창업자인 샘 월턴은 자사의 성공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직원들과의 효율적인 의사소통에 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여 직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 만큼 경영자를 비롯한 관리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커뮤니케이션 문화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무임 승차형

어떤 개인이 가장 크게 동기부여 되는 경우는, 회사나 조직으로부터 인정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이다. 이를 위해서는 관리자들이 부하의 헌신과 공을 제대로 인정해 주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부하의 공을 인정하고 배려하지 못하는 상사는 관리자로서 기본 책무를 유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전형적인 경우가 바로 자신은 별다른 노력이 없이 부하들의 헌신과 희생 덕에 직장 생활을 하는 무임승차형 관리자이다. 이런 관리자들의 두드러진 특징으로는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행위를 꼽을 수 있다. 예컨대 부하들이 고생해서 만들어낸 아이디어나 성과물을 자신이 직접 한 것처럼 하여 윗사람에 보고 한다든지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마치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받는다’는 식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부하들의 일할 의욕과 사기를 꺾고 상하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치명적인 독소가 될 수 있다.

말만 앞서고 솔선수범하지 못한다는 점도 무임승차형 관리자가 갖는 특징이다. 부하들과 같이 고민하고 현장에 몰입하기 보다는 지시만하고, 본인은 슬쩍 뒤로 빠져 관망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리자에게는 부하 직원들을 불필요하게 통제하고 감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정규 근무 시간 외에 특정한 목적이 없이 불쑥 전화를 하여 부하 직원이 야근하고 있는지, 주말이나 휴일에 나와서 근무를 하고 있는지를 체크 하는 행위를 하기도 한다. 관리자의 이러한 행위들도 부하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사기 저하를 가져오는 주된 요인이다.


감성 결핍형

감성 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 떨어지는 관리자도 큰 문제다. 감성 지능이 낮은 관리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은 부하의 감정이나 기분 등 내적인 심리 상태를 배려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관리자들 중에는 오직 일 밖에 모르는 일 벌레형 관리자들이 많을 수 있다. 구성원들이 잠시의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보면 불안해 하고, 사원들이 항상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야 마음을 놓는 경향이 있다. 상사가 지나치게 일 중심으로 움직이고, 부하의 개인적 고충이나 스트레스 등 인간의 정서적인 측면에 대해 무감각하게 되면 조직적 탈진(burn-out) 현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이는 구성원들의 일하는 재미, 의욕을 꺾고, 인재들이 회사를 떠나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Daniel Goleman이라는 학자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지속적으로 높은 성과를 내는 일류 리더들은 공통적으로 감성 지능이 높다고 한다. 지능이나 지적 능력, 기술적 능력은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한 필요 조건이기는 하나, 충분 조건은 아니다. 감성 지능이 낮은 사람은 날카로운 분석적 사고와 명쾌한 아이디어는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탁월한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한다. 감성 지능이 높은 관리자들은 자신의 말이나 행동이 부하에게 미치는 영향을 인식하는 자기 인지력,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에 적절히 대응 조치할 수 있는 감정 이입력, 부정적인 충동이나 기분, 행동을 조절하는 자기 통제력 등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GE의 웰치 전회장은 재임 시절 대대적인 구조조정으로 사원들로부터 중성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냉혹한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반면에 사원들의 정서나 감정을 배려하는 인간적인 섬세한 면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어느 사업부의 한 중견 사원이 웰치 회장 앞에서 직접 보고를 하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해당 직원은 굉장한 심적 부담을 받았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웰치 회장은 해당 직원에게 과다한 스트레스를 받게 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작은 선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다. 웰치는 결단력 있는 카리스마와 함께 부하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도 잊지 않은 섬세한 감성도 지니고 있었던 경영자가 아닌가 싶다.


해바라기형

위계적 관료 문화가 강한 조직에서 흔히 있는 현상의 하나가, 정치적이고 강자에게 절대 복종하는 해바라기형 관리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런 타입의 관리자는 윗사람에게 약한 대신, 아랫 사람들에게는 군림하려는 특성이 있다. 또한 자신보다 파워가 있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잘 보이려는 Show-up 기질이 강하다. 그 때문에, 부하의 공을 가로채거나 자기 보다 뛰어난 부하 직원들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이런 관리자 밑에서는 부하들의 사기 저하는 물론 제 2인자가 키워지기 어렵다.

‘빈 수레가 요란’하듯이 해바라기형 관리자는 뒤에서 조용히 일하는 도덕적 겸양이 부족한 면이 있다. ‘Good to Great’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Jim Collins에 따르면, 위대한 기업을 만든 일류 리더(Level 5 리더)들은 뛰어난 업무 능력 만이 아니라,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겸손함도 같이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일찍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는 백성이 그 존재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지도자(‘太上 不知有之’)라고 하였는데, 그 요지도 이와 같은 맥락이 아닐까 한다.


자린고비형

인재를 키우고, 지속적으로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기본이다. 이런 투자 마인드가 약한 사람이 자린고비형 관리자이다. 이 같은 관리자는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인재라는 큰 자산을 놓치는 소탐대실의 모습을 보이기 십상이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반드시 많은 자원을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예컨대, 교육훈련이나 복리후생 측면에서 보면,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종업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인들이 많이 있다. 관리자가 이런 부분에 드는 비용을 아까워 한다면 부하 직원들의 스트레스나 불만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투자는 금전적인 요인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시간적인 투자도 중요하다. 관리자가 자신의 업무 시간을 쪼개어 육성 활동에 투자하는 데 인색해서는 부하 직원들의 실력이 늘지 않는다. GE의 잭 웰치, 인텔의 앤디 그로브, 펩시의 로저 엔리코 등 일류 경영자들은 자신의 업무 시간의 상당 부분을 사원 교육 등 인재 육성 활동에 쏟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사원들의 작은 실패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것도 인색한 관리자의 특징이다. 실패 경험을 통한 학습의 효과 보다는 그에 따른 비용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관리자가 작은 실수나 실패조차 용인하지 않으면, 직원들이 보수적으로 흐르게 되어 창의성이나 도전적인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노키아, 3M 등 혁신 지향적인 기업에서는 R&D 프로젝트 등 중요한 과제를 추진하다가 실패하더라도 책임을 탓하기 보다는 재도전하도록 고무하는 소위 ‘Blame-free’ 문화가 강한데, 그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자유방임형

인재를 키우지 못하는 관리자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부하에 대한 건설적인 질책이나 피드백 활동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적인 관계가 깊어짐에 따라, 냉정한 입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의 완결성을 높이기 위한 세심한 점검과 피드백을 전혀 하지 않는 우를 범한다. 부하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칭찬이나 좋은 말만 하거나 인기에 연연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는 관리자의 기본 책무를 저버리는 자유 방임 행위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부하 직원들의 몸과 마음이 편할지는 모르나 일에 대한 몰입도나 실력이 늘지 않는다. 또한 업무 자세의 해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때로는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부하에게 따끔한 피드백과 충고를 가하는 단호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부하들이 상사에게 바라는 가장 큰 바람의 하나가 바로 ‘피드백’이라는 사실도 있다. 이 점에서 한국 축구의 4강 신화를 창조한 히딩크는 좋은 모범이 된다. 일부 스타 의식이 젖어 있는 선수들을 주전에서 제외시키는 등 냉정한 피드백과 질책을 통해 팀을 강하게 만들 수 있었다.


이지메형

인재를 상실하는 관리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자신의 눈 밖에 난 직원은 홀대하고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주는 타입이다. 예컨대 사소한 일에도 꼬투리를 잡아 야단을 치거나, 다른 사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이는 일본의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일종의 ‘이지메(いじめ)’에 가깝다. 마치 학교에서 특정 학생을 ‘왕따’시키는 것과 같은 행위로 특정의 부하 직원을 괴롭히고 소외시켜 버리는 현상이다. 이 같은 관리자의 행위는 당사자에게 심한 스트레스를 주어, 정신 건강을 파괴하고 직장 생활 자체를 어렵게 만든다. 또한, 다른 동료 직원들의 정서적 불안감이나 사기 저하를 유발하여 조직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다.

과로사가 많기로 유명한 일본의 경우, 10년 이상의 장기 불황으로 기업들이 어려워지면서 최근에는 직장내 이지메 현상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주로 상사가 부하에게 과도한 성과 압력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행위로, 심한 경우 우울증이나 자살까지 불러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예컨대, 과거 일본의 한 생명보험 회사에서 사원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주요 원인도 상사로부터 받은 심한 스트레스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참고: 週刊 ダイヤモンド, 2002. 5. 18).

구성원들의 능력을 키워주고, 잠재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시스템만으로 한계가 있다. 관리자의 리더십이 더 중요한 요인이다. 최근에 일본의 한 연구 기관이 실시한 조사를 보면, 직장내 스트레스의 가장 큰 요인이 ‘상사’라는 서베이 결과가 있다. 미국의 경우도 이런 연구 결과가 많다. 예컨대, 퀼컴사가 자사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인재들이 이직하는 큰 요인으로 상사의 리더십 문제가 지적된 바 있다. 당 연구원이 국내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서도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타난다. 인재 관리에 있어 관리자의 역할이 그 만큼 중요함을 보여 주는 증거들이다. 어렵게 유치한 인재들을 떠나가게 한다든지, 보다 강한 인재로 만드는 능력이 떨어지는 기업들은 앞서 언급한 관리자들의 모습 때문이 아닌지 심도 있게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007년 11월 12일 월요일

알제리 간략조사

아프리카대륙 북서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알제리민주인민공화국(Al-Jumh?r?yah al-Jaz?'ir?yah ad-D?muqr?t?yah ash-Sha'b?yah). 면적 238만 1740㎢. 인구 3281만 8000명(2003). 동쪽은 튀니지, 서쪽은 모로코, 남동쪽에서 남서쪽에 걸쳐 리비아·니제르·말리·모리타니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알제.

알제리의 자연
알제리의 지형
크게 아틀라스산맥지역과 사하라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아틀라스산맥지역에는 좁은 연안평야, 해발고도 1000∼2000m의 험준한 산악줄기로 되어 있는 텔아틀라스산맥, 해발고도 500m의 아틀라스고원, 해발고도 1000∼2000m의 비교적 완만한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등이 북쪽으로부터 차례로 늘어서 있다. 텔아틀라스산맥에는 유라시아지진대가 뻗어 있는데, 1980년 아스남에서 진도 7.5의 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발생했다. 사하라지역은 전체적으로 평균해발고도 500m 정도의 고원인데, 예외적으로 해발고도 3000m에 이르는 화산성이고 기이한 경관의 바위산 아하가르고원이 있다. 에르그라는 사구군(砂丘群)은 동부 대사구군 등 4곳에 있다. 북동쪽 끝에 있는 멜리르염호(鹽湖)의 해발고도는 해면 이하이다.

알제리의 기후
비는 겨울철에 많이 내리는데, 강우량은 주로 지중해 연안에서 많고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매우 적어진다. 기후는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이 지중해성기후, 아틀라스고원에서 사하라아틀라스산맥까지가 스텝기후이고, 연강수량 200㎜인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 가장자리 이남은 사막기후이다.

모든 지역이 여름에는 건조하고 기온이 높아 매우 덥다. 지중해 연안의 겨울은 온화하나 아틀라스산맥에서는 높은 산에 눈이 쌓일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기도 한다. 카빌리아산지 등 동부의 텔아틀라스산맥에서는 연강수량 1000㎜를 넘는 곳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수량은 적고 큰 강도 없어서 농업·공업·도시 용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편 사하라아틀라스산맥에서 아틀라스고원에까지 다다른 사막화를 막기 위하여 <녹색 장성(長城)계획(Barrage Vert)>이라는 대규모 식림계획을 실시하고 있다. 계절풍이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사하라에서 불어오는데, 모래가 섞인 뜨거운 바람 <시로코>는 유명하다.

알제리의 지리적 특색
지중해연안지역·스텝지역·사하라지역으로 구분된다.

지중해연안지역은 연안평야와 텔아틀라스지역으로 지중해성기후를 나타내며 자연조건이 가장 좋다. 식민지시대에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이주해 와서 포도·감귤류 등을 재배하는 농원을 경영하고 여러 도시에 유럽인 시가지를 만들었다. 독립한 뒤 유럽인농원을 재편성한 자주관리농장 대부분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근대적 기계화 농업을 하고 있다. 또한 중화학공업화정책에 의해 안나바·베자이아·스킥다·알제·아르주·오랑 등의 연안공업도시가 발전하였다. 수도 알제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 집중이 계속되고 있고, 미치자평야는 농업지역에서 주택도시지역과 근교공업도시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내륙부의 콩스탕틴·사티프·메데아·아스남 등 주도에서는 지방공업화정책에 따라 공장·주택이 건설되고 있으며, 농업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도시나 프랑스로 빠져 나가고 있다.

스텝지역은 아틀라스고원과 사하라아틀라스산맥을 포함하는 지역으로, 연강수량 200~400㎜이며, 곡물 재배와 목축을 겸한 농업을 하고 있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해에는 목초를 찾아 이동하는 반(半)유목적 목축도 하고 있으며 일부 자주관리농장을 제외하고는 기술이 낙후되어 있고 빈곤한 지역이다. 관개농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호도나호(湖) 개발이 검토되고 있으며, 젤파·바트나 등의 주도에서는 공업화가 추진되고 있다.

사하라지역은 사하라아틀라스산맥 남쪽에 있는 사하라사막으로, 주민은 물을 구할 수 있는 산기슭·고원기슭이나 계곡바닥에 있는 오아시스에서 산다. 오아시스에서는 샘물이나 지하수로를 통해서 얻는 물로 대추야자나 야채·과실 등을 재배한다. 농민들 가운데에는 노예로 쓰려고 남쪽에서 데려온 흑인이 많고, 물이 귀해서 물값이 비싼 데 따른 경제적 부담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우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다. 오아시스 주변을 근거지로 하는 유목민은 여름에는 가축을 데리고 북쪽의 농경지역으로 갔다가, 겨울에 오아시스로 돌아온다. 교통과 시장기능을 갖추고 있는 오아시스에는 시가지가 있으며 인구도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석유·천연가스가 개발되었고, 하시메사우드와 하시르멜에는 분리·송출 공장이 생겨 기술자와 노동자가 정주하고 있다. 산수의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한 가르다이아오아시스나 골레아에서도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레강에는 프랑스의 핵폭발실험장이 있다.

알제리의 역사
구석기시대나 타실리나제르의 암벽화와 같은 신석기시대의 유적을 남긴 원주민과는 달리, 오늘날과 직접 연결되는 마그레브지방의 고대 주민은 지중해인종에 속하는 베르베르인이고, 농경·목축을 영위하였다. 고대의 마그레브지방은 항해기술의 발달로 지중해 북쪽 연안과 동쪽 연안에서 온 페니키아·반달·비잔츠 등의 이민족에게 차례로 지배되었다. 그러나 지배자는 연안 여러 도시와 내륙부의 교통의 요지를 제압했을 뿐이었으므로, 베르베르인 각 부족의 정치·경제조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중세에는 아랍인이 침공해 들어와서 아랍화·이슬람화의 시대가 되었다. 7세기 중엽 마그레브지방으로 침입한 아랍군은 8세기 모로코에까지 도달했다. 베르베르인은 여기에 저항했으나, 아랍군은 개종한 사람을 동등하게 취급했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이 생겼고, 아라비아어와 이슬람문화도 침투하여 혼혈현상이 진행되었다. 이슬람교를 받아들였어도 베르베르어 및 베르베르문화를 고수한 부족도 있었는데, 이는 오늘날에도 카빌리아·아우레스·음자브(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각 지방에서 볼 수 있다.

16세기 초 알제리 연안에서 에스파냐군을 내쫓은 투르크군은 그대로 현지에 남아 이 고장을 오스만제국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이 시대 투르크총독의 지배영역 때문에 연안부에 오늘날의 국경이 정해지고 국가의 틀이 형성되었다. 총독부가 설치되었던 알제는 수도가 되었고, 오스만제국의 지배 아래에서도 여러 부족의 조직은 유지되었으나 속령정치의 지배실권은 이곳에 주재하는 투르크육군·해군(해적)이 장악했다.

1830년 샤를 10세 치하의 프랑스는 지중해에서 활동하는 해군(해적)을 제압할 목적과 마르세유 대상인(大商人)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원정군 투르크총독을 항복시켜 알제를 점령했다. 이것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지배의 시작이었다. 이후 132년 동안의 식민지시대에, 프랑스지배에 대한 저항과 부족사회 해체 속에서 비로소 알제리인의 국민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압델 카데르와 모크탈의 거병에 의한 저항은 유명하다.

프랑스 식민지하인 알제리에서는 1870년대 포도 재배 성공을 계기로 감귤류·야채 등 유럽시장을 겨냥한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농원이 발전했다. 그 밖에 철과 아연광산도 개발되었으나 1차 생산품을 수출하고 공업제품을 수입하는 식민지경제가 이루어졌다. 한편 토지를 빼앗기고 전통적인 사회를 해체당한 알제리농민은 도시로 나가거나 농원노동자가 되었다. 프랑스는 식민지시대 말기에 알제리인 700만 명에 유럽인 식민자(植民者)가 100만 명이었으므로 <동화정책>을 취하면서도 양자 사이에는 신분·소득면에서도 큰 차별을 두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패전으로 인하여 한때는 비시(Vichy) 정권 하에 들어갔는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점령으로 인해 C.A.J.M. 드골의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의 근거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다른 프랑스식민지는 잇따라 독립했으나, 알제리독립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5년의 <세티프의 학살>과 같은 탄압이 계속되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결성하고, 국민해방군(ALN)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1954년 11월 1일 FLN은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무력봉기를 한 뒤, 7년 4개월에 이르는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정부는 50만이나 되는 대군을 투입해서 가혹한 탄압을 가했으나, 도리어 민중은 FLN쪽으로 결집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958년 드골이 재등장하여 알제리의 민족자결권 승인을 원칙으로 하는 방침 아래, 1958년 9월 FLN이 수립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와의 교섭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1962년 3월 정전과 독립을 내용으로 하는 <에비앙협정>이 성립했다. 1962년 7월 3일 알제리는 독립을 달성하여 그해 9월 제헌의회의 선거가 집행되었고, 의회는 민주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했다.

알제리의 정치·외교·군사
알제리의 정치
1963년 9월 헌법초안을 채택하고, 초대 대통령으로 M. 벤 벨라를 선출했다. 이듬해 4월의 FLN대회에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신강령 <알제헌장>을 채택했다. 1965년 6월 19일 부총리 겸 국방장관인 H. 부메디엔 대령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나 벤 벨라는 실각하고 유폐되었다. 부메디엔은 헌법을 정지시키고 혁명평의회를 최고기관으로 하고 스스로 의장에 취임했다. 대통령 벤 벨라는 유럽인 소유농지를 국유화했는데, 부메디엔도 사회주의노선을 취하여 외국계 기업을 차례차례 국유화했으며 대학·전문학교 출신 행정관을 중용하여 국영회사에 의한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했다. 1971년 알제리인 소유농지를 재배분하는 <농업혁명>을 시작했다.

1966년 헌법 개정으로 의회는 상원 144명(임기 6년), 하원 380명(임기 5년)의 양원제가 되었다. 대통령은 강대한 권한을 가지며, 국가원수·국군최고사령관·국방장관을 겸하고 부통령·총리를 임명하며, 의원후보자를 지명한다(임기는 5년). 그리고 FLN이 대통령후보를 지명한다. 전국의 행정구는 32주, 160군, 704시·읍·면으로 되어 있고, 주와 시·읍·면에 각각 인민의회가 있다.

1976년 신헌법의 채택과 대통령선거 등의 민주화가 실행되고, 이듬해 국회선거가 실시되었다. 독립전쟁과 프랑스인 철수로 인하여 경제 파탄에 직면해 있던 이 나라를 <중진국>으로 성장시킨 부메디엔은 국민의 압도적 지지 속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1978년 병으로 사망하고 참모총장 샤들리 벤제디드 대통령이 그 뒤를 이었다. 1983년 3월 벤제디드정권은 최초로 총선거를 실시, 구세력을 일소하고 장기집권의 틀을 굳혔다.

한편, 1989년 2월 국민투표에서는 사회주의 단일정당 조항을 삭제하고,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안이 승인되었으며, 1990년 6월 처음으로 실시한 복수정당제에 의한 통일지방선거에서 이슬람교 원리주의 정당인 이슬람구국전선(FIS)이 FLN을 누르고 승리했다. 그러나 1992년 1월 벤제디드 대통령의 사임에 이어 군병력의 수도권 장악으로 FIS의 위치는 전복, 군부에 대항하여 강경투쟁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유혈사태로 주민 수만 명이 사망하였다. 1995년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당선된 제루알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기 전에 물러남에 따라 1999년 4월 대선에서 집권당 국민민주연합(RND)의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가 승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0년 8월 대통령이 지명한 각료들과의 불화로 내각이 일괄 사퇴함에 따라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알리 벤플리스를 총리에 지명, 새 내각을 구성하였다. 압델라지즈 뷰테플리카는 2004년 4월, 임기 5년의 대통령직에 다시 뽑혔다.

알제리의 외교
국제연합 비동맹 여러 나라의 리더이고, 자본주의 여러 나라와 제3세계 여러 나라에 외교 통로를 열어놓고 있으며, 1979∼1981년에 있었던 이란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 해결에도 커다란 역할을 수행했다. 아프리카통일기구(OAU)·석유수출국기구(OPEC)·아랍연맹에서는 강경파이다. 2000년 3월 지중해권 비나토국가의 협의체인 <지중해대화>에 가입하였다.

알제리의 군사
군(軍)은 독립전쟁 이후 정치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국민해방군은 독립 뒤 인민국군(人民國軍)이라고 개칭하였다. 총병력은 육군 12만 명, 해군 6700명, 공군 1만 명(2002)이다. 2002년 국방비 지출액은 21억 달러였다.

알제리의 경제·산업
자원·농업·공업·무역·재정
석유·천연가스가 총수출액의 95%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석유 의존 경제이다. 석유매장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석유수출은 제한하고 국내에서의 가공을 중요시 하였다. 2003년말 원유매장량은 17억 9900만 ㎘로 그 해 산출량 6094만 ㎘를 감안하면 29.5년 동안 채취할 수 있다. 천연가스 수출을 위해 유럽과 잇는 파이프라인(튀니지 경유 이탈리아 노선과 모로코 경유 에스파냐 노선) 건설을 추진, 유럽연합의 천연가스 총수요의 25%를 공급한다. 2000년 천연가스생산량은 893억 ㎥였으며 259억 8100만 ㎥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수출하였다.

1960년대에는 기간산업의 국유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1970년대에는 풍부한 석유수입을 바탕으로 해서 철강업·석유화학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국제경쟁력을 지닌 공업을 육성하지 못하고 국민에게 소비재를 제공하지 못했다. 농업은 취업인구의 24.4%(2000)를 차지하지만 GDP의 10%에 미치지 못한다. 곡물생산량도 250만 2000t, 경지 1㏊당 수확량 856㎏(2001)으로 저조하며, 곡물 자급율은 11%로 매우 낮다.

1985년 이후 석유값과 미국 달러의 하락에 의해 수출수입이 반으로 격감함에 따라 무역수지적자와 재정수지적자가 누적하여 정부는 마침내 경제개혁에 나섰다. 생활 기본 물자에 대한 보조금이나 사회복지 예산의 삭감에 의해 재정적자를 줄이고, 통화절하나 수입규제에 의해 무역수지 개선을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1994년 이후 대외채무의 상환 연장을 단행하고 세계은행·IMF와 협의하면서 진행시킨 경제재건에 의해 1997년에 무역수지가 개선될 수 있었으나(수출 151억 9000만 달러, 수입 75억 9000만 달러), 1998년에 석유값이 내려 무역수지와 재정수지가 다시 적자로 전락했다. 1997년 12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석유항공 산업을 개방하였다. 2002년 국내총생산은 1738억 달러이고 1인당 국내총생산은 5400달러였다.

교통
전체길이 4017㎞인 철도는 거의가 식민지시대에 부설된 것으로, 국영철도회사가 운영하고 있다. 도로 건설은 독립 뒤에도 계속되고 있으며, 1978년 사하라종단도로를 완공했다. 항공은 프랑스 각 도시로 노선이 연결되며, 20개 공항 가운데 8개가 국제공항인데, 국영회사인 알제리항공은 국내노선을 독점하고 있다. 항만으로서는 알제·오랑·아르주·안나바에 주요항구가 있다. 각 항구로부터 마르세유까지에는 정기 여객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알제리의 사회
원주민은 베르베르인이고, 7세기 이후 아랍인이 들어왔다. 혼혈과 이슬람화가 진행되어, 주민 가운데 아랍인이 80%, 베르베르인이 19%를 차지한다. 오늘날 베르베르인을 구별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베르베르계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는 것뿐이다. 베르베르인의 인구 비율은 18%이며, 주로 카빌리아·아우레스·가르다이아·아하가르의 여러 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대도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사하라의 오아시스에서는 흑인이 농업을 영위하고 있다. 공용어는 아랍어인데, 식민지시대에 아랍어 사용이 금지되고 강제적인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으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2가지 언어를 쓴다.

독립된 뒤 의무교육 보급에 노력한 결과 1998년의 문맹률은 32%가 되었다. 중등·고등교육에서는 공업화와 관련해서 기술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수니파)를 국교로 삼고 있으며 독립 뒤 민족주의와 결부시켜 계율을 지키는 것을 강화하고 있고, 이슬람 강경파의 무슬림동포단이 있다. 의료는 무료화되어 있고, 다른 사회보장제도도 전진상태에 있다. 특히 노동자총동맹(UGTA)의 조직이 강하고, 노동자보호는 높은 수준에 있다.

알제리의 문화
베르베르문화·아랍이슬람문화·프랑스문화가 있는데, 사상·언어의 양면에서 7세기 이후 아랍이슬람문화가 알제리인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문화가 근대화의 중심이 되어 정치·경제·교육 등의 여러 제도를 지탱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는 프랑스문화의 영향이 크다. 독립된 뒤의 문학·영화도 프랑스어로 발표되어 왔다. 언어면에서는 베르베르어를 민족어의 1구성어로 삼은 이후에 아랍어화 운동을 추진시키고 있는데, 베르베르문화를 지키는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문학·영화에는 독립전쟁이나 베르베르인 풍토 속의 강인한 생활방식을 주제로 한 것이 많다.

알제리와 한국과의 관계
독립 이후 한국을 기피대상국가로 여겨왔으나, 1980년대로 접어들자 노선을 바꾸어 국제무대에서의 공개적인 반대표명은 자제하였다. 따라서 체육·경제분야의 정부인사들도 차츰 방한하게 되었고, 1985년 이후 한국과 경제협력 및 통상교류가 추진되어, 한국 민간회사가 알제리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건설사업에 합작투자하기 시작했으며, 알제리로부터는 천연가스 도입계약을 맺었다. 2003년 대한수입액 1억 9165만 달러, 대한수출액 2억 2459만 달러이다. 2003년 체류자수 36명이다. 한국과는 1990년 1월, 북한과는 1958년 9월에 수교하였다.

알제리전쟁: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알제리전쟁: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노서경

머리말

알제리전쟁(1954-1962)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1) 막강한 해외 제국을 통치하는 서구 강대국과 그 힘과 논리에 종속되어 한 세기 이상 철저히 지배당한 약소민족 사이의 전면적인 대결이 알제리전쟁이었다.2) 그 전쟁은 전 날의 제국(帝國)인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1950년대 중반의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고, 비효율적인 기존의 제도를 버리고 근대화 작업에 나서야 했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전쟁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경위와 전쟁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인해 모든 국제정치와 모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원천적인 문제를 프랑스 사회에 제기했다. 알제리는 영국, 프랑스가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거느렸던 여러 지역의 여러 유형의 식민지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식민 지배세력에 의해 완전히 통합을 당해 이미 1848년 제2공화정기에 프랑스의 해외 도(道)로 전락한 존재였다.3) 따라서 1789년 혁명 이래 인간애와 보편주의를 주창해 온 프랑스 지식인은 인종과 종교와 문명이 다른 민족을 마치 브르타뉴와 알자스-로렌과 마찬가지인 듯 소유하고, 그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전쟁은 카빌(Kabyle)의 산악과 사하라 사막과 알제의 카스바(Casbah)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식민주의라는 서구 문명의 비이성적 원천이 지금 문제시되고 있음을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4) 알제리전쟁에서 소수이나 예리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의 교전(交戰) 상대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어쩌면 기이한 현상은 이러한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다.5)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반전 여론이 격앙되었고 미국 신문의 논필이 대단히 비판적이었어도 베트콩을 직접 지원하는 미국 지식인들의 행위와 언설은 있을 수 없었던 것과 비교를 해보면6)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알제리 사이에 상당히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프랑스 지식인과 알제리전쟁의 미묘한 밀착 관계는 1962년 종전으로 끝나지 않은 사실이다. 그 관계는 30년 또는 40년의 시간을 넘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지난날 보다 훨씬 확장된 형태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2000년 6월, 르몽드에서 한 알제리 여성이 전쟁기에 고문당한 것을 취재하여 보도한 것이 불씨가 되어 지난 수년간 알제리전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프랑스 신문과 방송, 화면을 덮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한 다양한 증언과 회상이 마치 봇물처럼 터졌고 이로써 프랑스 사회가 어떠한 주제들을 청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1차 연도의 주제로 살폈다. 참전 장병들의 심적인 부담, 프랑스군에 복무한 알제리인인 하르키와 그들의 후손들이 겪어온 갈등과 수난, 1961년 10월 17일 파리 시내에서 북아프리카인을 상대로 무차별하게 행사되는 공권력의 폭력 행위와 국가적 개입에 대한 논란, 알제리 민족해방의 실체인 FLN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부가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는 결국 식민주의로 인해 벌어진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성찰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가는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알제리전쟁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청산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방식에 의존할 문제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역사의 작업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7) 사실 2000년도 여름부터 직접 쟁점이 된 것은 전쟁기에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이었으며8) 전쟁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것은 별로 아니다. 그렇더라도 어떻든 식민 통치에서 일어난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가해와 피해의 절정이자 결산이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청산 작업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몫으로 양도된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의 정치와 프랑스의 지식인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착되어 있다는 미국 역사가 토니 쥬트의 명제의 적합성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대목이다.9) 2000년, 의회에 조사위를 설치하여 알제리전쟁에서 자행된 고문 행위를 재검토하자는 공산당 안이 부결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한 일시적 조사보다는 역사적이며 학구적인 작업을 통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프랑스와 알제리 양자의 선린 관계를 위해 보다 근본적이며 우선한다는 설명이었다.10) 이는 비시(Vichy) 정부 아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은 사안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사과한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며 따라서 당연시하기보다 마땅히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명을 위해서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알제리전쟁의 지적 청산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어떠한 계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또한 문제가 프랑스 내부에서만 발생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지중해 넘어 알제리에 결부된 만큼11) 이러한 지적 담론을 내어 놓는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이 얼마큼 사회의 반영인가, 아니면 반영이기보다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이 지식인가 하는 사회학자 아마드 사드리의 질문은 과거청산의 영역에 동원되어도 긴요하게쓰일 것이다.12)


1. 1950년대의 비판과 항의


이미 1952년에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북아프리카의 행진?에서 설명했고 다시 2차 세계대전 전쟁기의 상황만 별도로 연구되었듯이13) 북아프리카 민족주의는 2차대전의 참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대두했다. 알제리도 인구의 10분의 1인 유럽계가 토지와 생산 이윤의 절대 가치를 점령하도록 하고 10분의 9인 모슬렘은 법적으로 하등 인간 취급을 해 온 프랑스의 식민 정책이 변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다. 그들은 식민 종주국에 대해 일방적인 선의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군단의 피와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14) 그러나 1945년 5월 8일 세티프(S?tif) 시위에 대한 대규모의 진압작전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알제리 민중을 위한 쇄신책을 적용할 의사도 별로 없었고 지배에 물든 프랑스-알제리들의 사고방식을 흔들어 놓을 묘책도 없었다. 프랑스 국가의 입장에서나 일반적인 프랑스인들의 심성으로는 알제리가 별개의 독립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오직 프랑스를 훼손하고 음해하는 반국가적 발상이었다. 문명의 나라인 프랑스의 문화와 가치관에 동화되는 길만이 19세기에나 20세기에나 여전히 알제리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조건이고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반식민주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950년대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에서 어떠한 지식인이라도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15) 그 때문에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19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의 반식민주의적인 진술은 1950년대에 보아도 과감했고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알제리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의 계보는 1930년대를 지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가시적인 형태로 분명하게 형성되어 갔다.16) 2차대전 이후에도 파리 중심의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 알제리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고 1945년 세티프 봉기와 이에 대한 프랑스군의 진압작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식자층은 거의 감지하지 못했다.17) 오히려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일어난 것은 피에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알제리 현지의 사회계층 내부였다. 일부의 피에 누아르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직접 모슬렘들을 만나고 그들이 당하는 착취와 대가 없는 노동을 목격하고 또한 그들의 품격을 접하면서 모슬렘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성장했다. 소설과 에세이뿐 아니라 콩바(Combat)지를 통해 알제리를 부단하게 의식한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그러한 예로서 널리 알려진 경우이며 그러한 유형의 지식인은 카뮈 혼자일 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작가 쥴 루아, 역사가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전쟁 전과 전쟁기 내내 연구와 저술로 알제리 문제를 제기했다. 1954년 11월 1일 FLN 테러로 시작해서 1955년 프랑스 병력의 투입이 확대되고 1956년 2월 비상전권(Pouvoirs sp?ciaux)이 거의 만장일치로 본국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전쟁이 확실시되자 동시에 본국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긴급한 현안으로 알제리 정치범과 민주 인사들의 석방, 민주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해 알제리 민족운동의 거두 메살리 하지(Messali Hadj)의 감금을 해제하고 알제리에 민주화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에는 다양한 계열이 모였다. 이를 가리켜 제3세계주의(le tiers-mondisme)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시기의 진보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제인 약소국의 현실, 그들과 야소민족의 관계에 눈뜨면서 제시한 개념이었다.18) 클로드 리오쥐에 의하면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으로는 1945년 이후 형성되어도 이미 2차대전 이전에 공산당과 노조, 대학생들의 운동이 모두 식민지 문제에 주목했다.19) 알제리전쟁에 대한 1950년대의 비판적인 지식인 세계는 이처럼 일정한 노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앙드레 망두즈, 루이 마시뇽, 앙리 마루 같은 인사들처럼 가톨릭 지식인들이 전쟁 초기부터 시작하여 전쟁 이후까지 일관된 자세로 식민지의 현실을 분석하고 전쟁의 모순을 파헤친 것이었다.20) 프랑시스 장송망(網)은 좌파 지식인들이 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여 재판을 받은 유명한 사건이지만 기독교 사제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장송망을 지원하는 것은 신자가 아닌 가담자들에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가톨릭만이 아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할도 중요했다.21) 그러나 1958년 취임과 함께 알제리 독립의 방침을 취하는 드골 정부에 대해 폭력 행사로 맞선 OAS의 행태에서 보듯이 1950년대 지식인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과 비난은 강력한 극우의 적수를 만났다. 그것은 더구나 일반의 무관심에 포위된 외로운 소수였다.


2. 1990년대와 1950년대의 연속성과 변화

2000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뤼마니테에 나타난 12인 선언은 40년의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전쟁에 대한 항의의 정신이 당시의 당사자들에게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2인 선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며 거의 금기시되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활기를 띤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의 정신이 연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그것은 도구와 장치를 만나야 했다. 근래 수년간 수없이 쏟아져 나온 알제리전쟁에 대한 보도와 논평, 증언은 분명히 르몽드와 리베라씨옹, 뤼마니테 같은 좌파 언론이 주도했고 여기에 방송과 텔레비전이 영상을 통한 계속적인 보도로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22) 그러나 르몽드도 뤼마니테도 1950년대의 계승이란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주장과 그 표현의 매체 양면에서 1990년대와 1950년대에 어더한 연속성이 놓여 있느냐 하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필경은 인간의 권리라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오래된, 그러나 근래에 새롭게 강조되는 이념이 그러한 연속성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23)

하지만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에 관한 논의는 프랑스 지식층만의 독점적인 논의를 벗어났다.24) 1950년대에도 물론 알제리의 작가와 신문기자, 시인, 연극인들이 피식민지의 질곡에 갇혀 배우지 못하고 헐벗은 알제리 민중의 대의를 대변했다. 장 암루슈는 정복자가 과시하는 순전히 우발적인 우수성 앞에서 그것이 천성적인 우수성인 듯 굴복하는 피지배자의 의식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25) 그러나 고급 두뇌를 키워내기가 어려웠던 전쟁기에 비해 1970-80년대 북아프리카의 지적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활발해졌다.26) 문학과 사회학, 인류학 또 역사학 등 거의 모든 인문 사회분야에서 아랍 세계와도 다른 북아프리카의 독특한 풍토와 역사, 현실이 분석 규명되고 있다.27) 남아메리카 문학의 전성기에 이어 마그레브 문학은 1980년대부터 불어권 문화에 유럽인의 의식과 세계에서는 찾지 못할 풍성함을 공급하게 되었다. 벤 젤루운 같은 영향력 있는 대중 평론가와 타사디트 야신 같은 언어 인류학자의 활동은 알제리 전쟁기의 거장 작가들을 의식적으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자신과 동족(同族)이 속한 지식인과 민중의 심적이고 실질적인 어려움을 파고들고 대변하고 있다.28)

물론 이러한 지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착오에 가깝다. 자크 마르세유에서 보듯이 알제리에서 식민 모국인 프랑스가 이룩한 것에 대해 프랑스 지식인들이 잘못이 많았다고 회개(repentance)하는 것은 아니다.29)  ?식민주의 흑서?를 간행한 마르크 페로 같은 역사가는 프랑스 사회에서 식민 통치에 대해 지금 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30) 그것은 극히 일부 연구자들에 한정된 역사의식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식민지 시기와 전쟁기 또 그 이후에도 알제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고려하지 않던 식민주의적 인식은 1990년대에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알제리는 하나의 민족(nation)”이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가 나오는 것이 1956년이었고31) 어쩌면 기이한 이 기사의 제목은 그만큼 알제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에 의해 부인되고 있던 사실을 반증한다. 샤를- 앙드레 쥴리앙은 이 기사에서 민족을 형성하는 자연스러운 의식과 공동운명체의 감각을 알제리인들은 획득했고 이를 집요하게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규정해야 했다.32) 알제리전쟁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1970-80년대에도 그러한 인식은 거의 당연시되었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지식인의 담론과 사회의 인식에서 그같은 알제리 민족에 대한 부정은 사라졌다.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재판”을 알제리 역사가는 당당히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오기까지에는33) 사실은 알제리의 민중, 또 프랑스로 건너와서 하층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던 수많은 삶이 있었다.  

3. 이민자 도시빈민과 지식인

왜 이민 노동자라는 사회적 문제가 알제리전쟁 청산이라는 제한된 주제와 연결되어야만 하는가. 알제리인인 사회학자, 압델말레크 사야드는 여기에 명료하게 답을 내놓고 있다. 이민자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연장이다.34) 199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알제리 이민자는 60만명이 넘고 이 공식 숫자에 1947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인으로 등록된 알제리인을 포함하면 1백만 명이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이후로는 프랑스 노동력의 필수적 요소인 이민 노동자는 전체 인구의 7%이며 그 중에서 포르투갈인을 제외하면 알제리인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인구가 계속 급증하고 반면 취업의 가능성은 약한 알제리의 사회 현실이 사람들을 계속 몰아내고 있고 그들이 갈 곳은 프랑스이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상존한 낭테르 빈민촌의 상태는 벗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교외 보비니(Bobigny)와 누아지(Noisy)에도 일정한 기준의 주거와 공동체의 설비와 최소의 문화를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민자 문제는 프랑스 지식인이거나 알제리 지식인이거나 날이 갈수록 생각하게 되는 암적 현실이다.35) 유럽인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유럽중심주의, “나의” 역사만이 역사라는 사고의 기반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가를 알제리와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들은 정시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36)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 순종하고 동화되려고 하며 공격을 받지 않으려고 하지 눈에 띠고 구분되려고 하지 않는다.37) 그런데 극우적 세력이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바로 그들도 우리와 같을 수 있다는 모습이다. 산업계의 조건과 사회구조 양면에서 이민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러나 그들이 통합(int?gration 이 말은 식민지 시기의 동화assimilation에 대체해서 등장했다)되는 것도, 통합되지 않는 것도 모두 문제인 구조이다.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때로는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투쟁을 기울여야 하는 이민자 세계는 식민주의의 과거이며 현재이다. 알제리전쟁이라는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내 곁에 있는 지난 날 식민지인들이었다.38)


4. 1990년대 알제리 폭력에 대한 지식인의 대결 

이에 더해 1992년부터 알제리에서 일어난 격심한 정치적 폭력은39) 지중해 양안의 지식인의 의식을 날카롭게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유일정당에서 복수정당의 정치체제로, 군부 중심에서 민간 정치로 이행하려는 국가 건설이 세계적으로 드문 유혈을 빚고 있는 1990년대 알제리 사태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40)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근대화의 조건이라면 그러한 근대화는 거부하려는 이슬람 노선에 대해41) 민주주의 세력이 좌절하고 무참한 살해와 고문을 당하고, 무고한 주민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알제리 국가의 불투명한 입장과 대응 폭력의 문제 역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알제리 사태는 프랑스에서는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알제리인들이 이 가공할 폭력을 피해 안전한 장소를 찾을 곳은 프랑스뿐이고 이와 함께 알제리의 이념적 폭력이 곧바로 프랑스 땅으로 건너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위기감과 알제리의 자원을 의식해야 하는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가 90년대의 상황을 q상하게 주목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타사디트 야신은 이 폭력이 당대에 형성된 폭력이 아니라 발생학적인 계보를 갖고 있다고 식민지 시대와의 연결을 제기했다.42) 그것은 인류학자인 타사디트 야신의 독단적인 견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는 FLN의 내적 구조도 다시 보도록 이끌었고43) 반대로 알제리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도 강성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식민주의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지만 1990년대에 알제리의 도는 알제리 출신의 수많은 젊은 자가와 사회이론가들이 배출된 것은 폭력 앞에서 아연하기를 거부하고 이를 직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반대로 이러한 지적 각성에 대응하여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알제리역사와 정치에 관한 참고문헌을 의도적으로 출간하면서 그들은 위기에 대해 이렇게 대면하고 대결하자고 제언했다.        


맺음말


알제리전쟁을 주제로 한 프랑스의 과거청산 방식이나 양상은 사법적이거나 정치적이라기보다 분명히 지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소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지만 정치적인 방법만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시사한다. 폴 리쾨르가 명료하게 말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수난에 대해 방관하지 않는 지식인의 자세가 밑거름이었으며 또한 희생자와 사회 사이의 연대이며 다리였다. 적이 사방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알제리전쟁을 문제삼는 것은 당시에는 메아리 없는 외침 같았다. 사회당, 공산당, 노조, 공화좌파 그리고 일반국민 사이에서는 물론이며-지식인 내에서도 그들의 비판은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언과 행동은 다음 세대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남았고 후대는 앞서간 지식인들의 외로웠던 투쟁을 계승하고 확대했다.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 논의는 이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상속받은 바가 있고 그러한 증거를 어떠한 도구와 수단으로 찾아낼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만으로 그치게 되지는 않는다. 사회의 기층 노동은 이민자들에게 떠넘기고 많은 젊은이들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희망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알제리전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심각한 부정의는 양상을 달리하여 확대되고 있고 지식인들은 이 서구 백인 문명의 깊은 모순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제리에 대한 이러한 결산이라면 결산은 프랑스의 헤게모니의 유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직접적인 식민 지배 방식이 퇴조했어도 프랑코폰(francophone)이라는 유연한 개념을 창출하여 강력한 지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국가의 존재는 충분히 살아남았다.44)

<출처: 역사와 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1) 프랑스는 알제리전쟁에 전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않고 전쟁 발발 후 40여 년 간 공식적으로는 질서유지작전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의 문제와 역사는 그 전쟁이 얼마나 착잡하고 양자 사이에 괴리감이 깊었는가를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거일 것이다. 1999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의회는 알제리전쟁이라는 이름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된다.



2) 영국 역사가 마이클 케틀은, 프랑스인은 누구라도 알제리전쟁에 대한 공정한 역사를 쓸 수 없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알제리전쟁사로는 다음의 저술을 들 수 있다. Alistair Horne, Algerian War, Michael Kettle, De Gaulle and Algeria, 1940-1960, Quartet Books ; Hartmut Elsenhans, La IVe R?publique et la guerre d’Alg?rie(traduit),


3) 그러나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이 시작된 이래 에미르 압델-카데르를 지도자로 알제리의 주요한 전사(戰士) 부족들은 50년간 항쟁을 지속했으며 이러한 19세기 역사는 최근 알제리에 있는 알제리 역사가들에 의해 특히 주목받고 있다.


4) 대표적으로 Jean-Paul Sartre, Situation VI; Raymond Aron, La trag?die alg?rienne; Albert Camus, Chronologe alg?rienne.


5)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지를 편집한 프랑시스 장송과 수십 명의 지식인, 노동운동가, 예술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FLN의 자금 운반책이 되고 요원들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여권을 위조하는 활동을 벌였다. 당시의 경위와 가담자들의 회고는 Francis Jeanson, Alg?rie hors la loi; Jacques Charby, Les porteurs d’espoir, La d?couverte, 2004.


6) 베트남전쟁기의 미국과 알제리전쟁기의 프랑스 학계 및 언론을 비교한 미국 학위논문.


7) 2000년 10월 뤼마니테에 발표된 12인 선언


8) 고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Hafid Keramine, La pacification, Livre noir de six ann?es de guerre en Algerie, La cit? ?diteur, Lausanne, 1960. 전체에 주목하게 된다.


9) Tony Judt, Past imperfect. French Intellectuals, 1944-1956,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10) Ecrire l’histoire commune par Fran?ois Loncle, Pr?sident de la commission des Affaires ?trang?res de l’Assembl?e nationale, Lib?ration, mardi 24 juillet 2001.


11) 프랑스와 알제리 두 사회의 문제이지만 어떻게 보면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파리 중심의 비판적 지식인 세계가 있고 알제리 자체에서 양성되어 프랑스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와 언론인, 문학가들이 있고 그런가하면 액스앙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등 남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 알제리를 여전히 별개이기 보다 하나인 듯 간주하는 관점이 유력하다. 


12) Ahmad Sadri, Max Weber’s Sociology of Intellectuals,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33-37.


13) Charles-Andr? Julien, L’Afrique du nord en marche, Alg?rie-Tunisie-Maroc 1880-1962, Omnibus, 2002, pp.235-292; Christine L?visse-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Albin Michel, 1998.


14) 이러한 전쟁과 민족주의의 상호 영향은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긴밀하게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Gilbert Meynier의 노작을 보라. Alg?rie r?v?l?e, La guerre de 1914-1918 et le premier quart 여 XXe 냗칟, Geneve, Librarie Droz, 1981.


15) 프란츠 파농의 저서에 서문을 쓰고 또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해 소유한 것이 없으므로 상실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16) 연합군이 알제리 해안을 지중해 작전의 거점으로 정했고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역시 알제리 병력을 비롯한 아프리카 군단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모슬렘 알제리인들은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들의 권리 신장에 획기적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C. L.-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pp. 332-357.


17) Setif 봉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Annie Rey-Goldzeiger, Aux origines de la guerre d’Alg?rie 1940-1945, La d?couverte, 2002.


18) Jean-Pierre Biondi, Les anticolonialistes(1881-1962), Robert Laffont.


19) Claude Liaizu, Aux origines des tiers-mondisme, L’Harmattan, 1982. 


20) Andr? Mandouze, France Observateur, 1959. “진실로 조국을 배신하는 자는 누구인가”하고 그는 그를 배신자로 비난하는 측에 반문한다.


21) Geoffrey Adams, The Call of Conscience. French Protestant Responses to the Algerian War, 1954-1962,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Canada), 1998; Ren?e B?darida, La gauche chr?tienne et la guerre d’Alg?ire, in La guerre d’Alg?rie et les chr?tiens, Cahiers de l’IHTP, 9, octobre 1988. sous la direction de Fran?ois B?darida et Etienne Fouilloux


22) 알제리전쟁의 영상화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나왔고(Philip Dine, Images of the Algerian War, French Fiction and Film, 1954-1992, Clarendon Press, Oxford, 1994). 프랑스 대학의 미간행 학위논문들도 이 분야를 다루었다.  


23) 2004년에 새로 편집 간행된 Les droits de l’homme를 보라.


24) 일간지 르몽드에 의해 2000년에 촉발되어 알제리전쟁 50년이 되는 2004년에 와서는 여러 부문에 걸친 연구들이 일대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Philip Bourdel, Le livre noir de la guerre d’Alg?rie, Fran?ais et Alg?riens 1945-1962, Plon, 2003; Mohammed Harbi, Benjamin Stora, La guerre d’Alg?rie 1954-2004 la fin de l’amn?sie, Robert Laffont, 2004; M. Harbi, Gilbert Meynier, Le FLN documents et historire 1954-1962, Fayard, 2004.


25) Jean El-Mouhoub Amrouche, Un Alg?rien s’adresse aux Fran?ais ou l’histoire d’Alg?rie par les textes(1943-1961), ?dition ?tablie par Tassadit Yacine, Awal/L’Harmattan, 1984.


26) 아랍 세계 전반에 걸쳐 대학생의 양적 증가와 학위 소유자가 대폭 늘었고 오히려 이들 고급인력의 유럽과 미국 이전이 문제이다. The Arab Brain Drain, ed. by A.B. Zahlan, Ithaca Press, London, 1981. 


27) 이민문제와 인권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드리스 엘 야자미는 마그레브 지식인의 주요한 잡지로, AWAL, Confluences, Horizons Maghrebins을 소개한다. 파리의 L’Harmattan 출판사, 남불의 Acte du sud 출판사 등에서 북아프리카 저술의 간행에 집중하고 있다.


28) 영어로도 번역된 Tahar Ben Jelloun, Hospitalit? fran?aise, Racisme et immigration maghr?bine, Editions du Seuil, 1997(1984); T. Yacine-Titouh, Chacal ou la ruse des domin?s aux origines du malaise culturel des intellectuels alg?riens, La d?couverte, 2001. 


29) 마르세유는 풍부한 화보 자료를 동원한 프랑스와 알제리의 서문에서 지리와 역사가 프랑스와 알제리가 협력하도록 운명지었다는 말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19세기의 프랑스인이 아니라 민족해방군(ALN)의 사령관이었고 알제리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이었음을 상기하고 알제리에 대해 향수도 만족감도 버리고 또한 회개의식도 없이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Fran?ais et Alg?rie, sous la direction de Jacques Marseille, Larousse, 2002, Pr?face.


30) Marc Ferro, Le livre noir du colonialisme,  2003.


31) Charles-Andr? Julien, Une pens?e anticoloniale, Positions, 1914-1979, Sindbad, 1980. "L’Alg?rie est une nation", Demain 26 avril 1956, 재수록.


32) C-A. Julien, 같은 기사.


33) OUAR Larbi, Le proces de l’imperialisme et de colonialisme francais, L’Algerie, bastion de la resistance, Entreprise nationale 여 Livre(Alger), 1986.


34)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suivi de l’entretien de Hassan Arfaoui, Editions Bouchene, 2002, p. 102


35) Alain Gillette, Abdelmalek Sayad, L’immigration alg?rienne en France,


36)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p.33.


37) T. Ben Jelloun, Hospitalite fran?aise.


38) Sujet et citoyennet?, Maghreb/Europe, Cahiers Intersignes, n° 8-9 automne 1994.


39) 많은 기록과 증언 중에서 예를 들면 화보집인 Michael von Graffenried, Journal d’Algerie 1991-2001, Editions Autrement, 2003.


40) 알제리의 국가 건설과 이념의 문제, 1990년대 상황에 대해 William B. Quandt, Between Ballots and Bullets, Algeria’s Transition from Authoritarianism,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8; Rachid Tlemcani, State and Revolution in Algeria, Westview Press, Colorado, 1986; Kay Adamson, Algeria, A Study in Competing Ideologies, Cassel, London & New York, 1998.


41) 그러나 FIS의 강경노선만이 이슬람 세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온건 개혁주의의 이슬람도 존재한다.


42) Tassadit Yacine, Is a Genealogy of Violence Possible?, Research of African Literature 30 no3, Fall 1999, pp.23-35.


43) G. Meynier, Histoire interieure du FLN 1954-1962, Fayard, 2002.


45) Alec G. Hargreaves, Mark Mckinnsy(ed.), Post-Colonial Cultures in France(Routledge, 1997).

알제리와 프랑스(기사)-배신자’의 고통을 인정하노라

2004년07월08일 제517호
‘배신자’의 고통을 인정하노라

42주년 맞은 알제리 독립이 남긴 과제…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에 협력한 알제리인들 집단 소송

▣ 파리= 이선주 전문위원 nowar@tiscali.fr

7월5일 알제리는 독립 42주년을 맞이했다. 1962년 3월 ‘에비앙조약’의 결실로 같은 해 7월5일 획득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로써 알제리는 8년간의 전쟁과 132년(1830∼1962)간의 식민지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역사는 기억의 생명’이라고 한 ‘시세로’의 말처럼, 기억이 역사로 바뀌는 과정에서 엿보이는 알제리와 프랑스의 양상이 식민의 역사를 가진 한국인의 눈길을 끈다.

“시라크는 비자를 가져오지 않았다”


△ 3월23일 열린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의 선거 유세.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알제리 방문은 연임을 꿈꾸던 부테플리카의 야심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사진/ GAMMA)

2003년 3월 프랑스의 시라크 대통령이 알제리를 공식 방문했다. 당시 알제리의 언론들이 뽑은 주요 제목들을 살펴보면, 식민의 잔재와 화해 그리고 기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들을 엿볼 수 있다.

“수천명의 알제리인들, ‘비자! 시라크, 이라크를 위해 비토권! 시라크’라는 외침으로 시라크를 환영하다” “시라크,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들을 용서하고, 독립전쟁의 모든 희생자들을 경외심으로 대하자고 요청하다” “부트플리카 연임을 바란다” “음흉한 화해” 등.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은 대선에서 연임을 꿈꾸던 알제리 대통령 부트플리카의 야심이라는 설이 있었다. 결국 부트플리카는 지난 4월 대선에서 83%의 득표율을 얻어 재당선됐다. 알제리에서 프랑스가 갖는 정치·경제적 의미의 중요성을 짐작케 하는 구절이다. 사실 프랑스는 알제리 해외 시장경제의 24%를 차지하는 경제협력 1위국이다.

알제리인들에게 프랑스는 가장 가까운 선진국이며, 지상의 엘도라도다. 그래서 시라크가 방문하는 그 순간에도 젊은이들이 엘도라도로 향하는 ‘비자’를 외치며 프랑스 대통령을 환영했다. 2002년 프랑스가 알제리에 발급한 비자는 18만3천건으로 집계된다. 민중학살이 한창이던 1990년대는 제외하더라도, 1980년대 연간 80만건 비자에 견주면 상당히 줄어든 수치다. 두 나라간 비자협정의 경직성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시라크의 알제리 방문 기간은 이라크 전쟁 직전 프랑스가 미국에 맞서 반전을 외치던 때라 반전 입장을 친아랍으로 해석한 알제리인들은 ‘아랍인의 친구, 시라크’라는 구호로 시라크를 대환영했다.

“알제리인들은 산타할아버지 시라크에게 작성했던 선물 목록을 찢어버려야 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이 잠에서 깨어나 트리 밑을 보았을 때, 거기엔 비자도 돈도 에어버스도 지네딘 지단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니까.” 당시 알제리 일간지 <르마탱>은 이렇게 썼다. 비자, 일자리, 에어버스 그리고 부모가 알제리인인 프랑스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으로 상징되는, 프랑스로 향하는 알제리인들의 희망은 받아들이고 싶지만 결코 받을 수 없는 꿈속의 선물이라는 얘기다. “시라크는 우리에게 비자를 가져온 게 아니라, 그들의 아르키들을 데리고 왔다”라고 같은 신문이 쓰고 있다. 시라크가 알제리 방문길에 아르키 출신 프랑스 정치인 암라위 메카세라를 동반한 데 대한 묘사다. 메카세라는 현 프랑스 정부의 국방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인물이며, 알제리 출신으로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편에 가담하여 싸운 보병대 사무관이었다.


△ 4월10일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고 있는 알제리인들.(사진/ GAMMA)

다른 식민지들과 굳이 구별한다면, 알제리는 단지 식민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프랑스령 국토화하는 정책을 펼쳤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에 부응하여 이주정책을 권장하면서 프랑스인은 물론이고 알제리에 이주해오는 유럽인들에게 프랑스 국적을 부여하기도 했다. 알제리의 프랑스인들을 ‘피에 느와르’라 부르긴 했지만, 알제리인들도 공식적으론 프랑스인으로 취급됐다. 따라서 식민지 시절 평범한 알제리 청년들은 프랑인들처럼 국방 의무를 지며 군사훈련을 했다. 그 와중에서도 알제리 독립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은 계속되어,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을 주축으로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독립 뒤 15만여 아르키 학살

알제리 독립전쟁(1954∼62) 당시 프랑스쪽에 가담하여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알제리 출신 군인을 ‘아르키’(Harki)라 부른다. 따라서 독립을 갈구한 알제리인들에게 아르키는 ‘배신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아르키라는 명칭은 좀더 일반화되어 쓰여지며, 그들의 가족이나 굳이 군인이 아니라도 같은 의도를 실행했던 일반인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유엔의 자료에 따르면 1962년 독립 직전 알제리에는 6만여명의 군인들을 비롯해 공무원이나 보충원 등 26만3천명의 아르키가 있었다. 그 가족들을 포함하면 거의 100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알제리의 무슬림 알제리인들의 총수가 800만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아닐 수 없다. 이는 132년간의 기나긴 점령의 역사로 짐작할 수 있다.

“알제리는 영원히 프랑스일 줄 알았다”고 당시 아르키들은 한탄했다. 어쨌든 1962년 3월 알제리의 독립을 기약하는 에비앙조약 체결 이후 가장 막막한 미래와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이 바로 아르키이다. 그들 중 소수가 프랑스로 떠났고, 미처 떠나지 못한 일부는 독립 알제리군에게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 당시 FLN에 의해 학살당한 아르키가 15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르키 학살은 알제리 독립을 승인한 에비앙조약이 체결되고 난 뒤에 행해진 학살이라 ‘인권유린’과 결부된다. 아르키들은 당시 알제리에 주재하던 프랑스인들처럼 적극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아직도 아르키들은 공식적으로 알제리를 방문할 수 없다.


△ 알제리 빈민가의 아이들. 알제리 국민들에게 프랑스는 아직도 지상의 ‘엘도라도’다.
(사진/ GAMMA)

인권의 나라라고 널리 알려진 프랑스에서 알제리 전쟁 동안 프랑스쪽이 행한 ‘전쟁포로의 학대’와 더불어, 아르키 처리 문제는 프랑스 현대사의 가장 암울한 장이었다. “아르키는 과연 누구의 희생자들인가”라는 논란은 아직도 프랑스에서 일고 있는 이슈다. 2001년에는 아르키와 그들의 가족에 의해 인권유린 명목으로 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되어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아르키와 관련해서 진지한 논쟁이 또 한번 불거졌다. “프랑스를 돕다가 알제리 독립과 함께 비참하게 학살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하도록 방치한 프랑스의 책임”이라는 논지로 소송을 제기한 원고들의 소송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에비앙조약 체결 뒤 프랑스의 무기 회수 명령으로 인해 자기방어가 불가능했으며, 그렇다고 프랑스쪽에서 적극적으로 보호해준 것도 아니어서 학살당했다. 이후 프랑스로 호송됐던 아르키들조차도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인권이 유린됐다.” 이 소송에서 흥미로운 점은 원고쪽이 정작 학살을 강행한 알제리는 접어두고 그 화살을 프랑스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알제리에는 아무 기대도 할 수 없기 때문에 프랑스로 향해 외치는 인권 회복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나타낸 것이라는 견해도 나타냈다. 아르키 문제는 프랑스에선 그나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알제리에선 선뜻 논의하길 꺼려하는 터부에 속한다.

다행히 지난 6월11일 프랑스 국회에서는 “아르키의 노고와 고통을 인정한다”는 법이 통과됐다. 에비앙조약 이후 42년 만에 채택된 이 법안은 알제리, 모로코, 튀니지에서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참여한 내국인들의 고통과 학살에 대한 대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일종의 ‘기억과 역사에 대한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된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적 과오에 대한 반성이 곁들여져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아무튼 역사적 과오를 청산하려는 정치적 진전임은 분명하다.

역사적 과오 청산하는 법안

이 법안의 여파로 아르키에 대한 배상금 내역이 늘어났고, 그들의 자녀에 대한 특혜 정책도 부쩍 늘어날 전망이다. 프랑스는 식민 시절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 싸운 전사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한다. 아울러 학교의 역사교육에도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숨진 식민지인들에 대해 사의를 표하는 내용을 첨가할 계획이다. 132년, 그건 알제리의 과거인 동시에 프랑스의 과거다. 진정한 화해의 역사란 그 역사에 얽힌 나라들간의 노력에 의해서만 진정으로 이뤄질 수 있음은 유독 알제리와 프랑스뿐 아니라 모든 나라가 명심해야 하는 교훈이다.

 

2007년 11월 2일 금요일

아토피에 대해서

아토피 피부염이 오게된 직접적인 원인인 나쁜 식습관을 바꾸지 않는다면 독극물을 계속 삼키면서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이라 할까...

3개월간 자정요법을 열심히 한 후 그 동안 절제해왔던 생활을 마음껏 풀어놓고 즐기다보면 아토피는 다시 찾아올 수 있습니다.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법인 `니와요법`을 유행시킨 일본 아토피 전문가 니와 유키에 박사가, 지난달 한국을 방문해 `아토피성 피부염의 증가,중병화의 원인`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강연에서 아토피 치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식이요법이라고 강조하면서,인스턴트 식품 일색인 우리의 식습관을 지적했다.아토피 권위자가 주장하는 식이요법이란 무엇일까? 아토피를 잡기 위한 음식의 선택 요령과 건강하게 먹는 법에 대해 알아봤다.


아토피 식이요법의 포인트는 아토피의 원인이 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을 금기하는 것이다.고기 종류와 기름진 음식 그리고 유제품 등이 대표적인 예인데,이것들은 아토피를 악화시켜 치료에 방해가 된다.아토피에 좋지 않은 음식은 치료 과정 중에는 물론이고 치료가 끝난 후에도 먹지 말아야 한다.간혹 '금기 음식을 조금만 먹으면 안 될까','조금 먹는 것은 괜찮겠지',혹은 '치료가 끝난 후에 먹는 것은 무방할거야'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아토피를 뿌리 뽑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금기 음식을 철저히 지켜야 그 효과를 빠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기름기 많은 음식과 가공식품이 가장 나쁘다.


아토피성 피부염에서 주의할 음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름기 많은 것과 가공식품은 더욱 삼가야 한다. 기름기 많은 음식에 들어 있는 지방 성분은 우리 몸속에서 활성산소와 결합해 과산화지질이라는 물질을 만들게 되는데, 이 과산화지질은 우리 몸의 세포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아토피성 피부염을 더욱 악화시킨다.
각종 가공식품에는 식품첨가제가 들어가 있게 마련인데, 이 식품첨가제는 대부분 화학물질이어서 몸속에서는 이물질로 인식되어 알레르기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가공식품을 자주 먹는 경우에는 체내에 식품첨가물이 쌓이면서 새로운 독성을 가진 화학물질을 생성하기 때문에 아토피성 피부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기름기가 많은 음식과 식품첨가물이 으레 들어 있게 마련인 가공식품, 이런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아토피성 피부염의 증상이 심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또 치료를 통해 나아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식탁에 반영하기 | 소량의 살코기와 식물성 기름으로 채소를 살짝 볶는 정도로만 먹인다
기름기 많은 고기류는 절대 먹이지 말아야 하지만, 살코기일 경우 기름기가 붙어 있지 않은지 확인하고 제거한 후 반드시 삶아서 먹여야 한다. 순살코기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이때 먹이는 양도 보통 아이들의 10분의 1 정도만 먹인다. 장조림은 냉장고에 차게 두었다가 꺼내면 기름기가 응고되므로 냉장고에 넣었다 빼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 기름기를 완전히 제거한 후 먹인다. 기름이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식물성 기름으로 채소를 볶는 정도라면 괜찮다. 단지 튀김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다량의 식물성 기름을 섭취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생우유와 유제품은 먹이지 않는다

생우유와 동물성 기름이 원료가 되는 마가린, 버터, 마요네즈 등의 유제품은 먹이지 않는 것이 좋다. 생우유를 흡수시키기 위해선 유당 소화효소가 필요한데, 인종에 따라 분비량이 달라 동양인인 경우 이 효소의 분비량이 극히 적다. 소화흡수가 되지 않은 단백질은 몸속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아토피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더욱이 동물성 기름이 원료가 되는 마가린, 버터, 마요네즈 등은 아주 소량 이용하는 것이라도 아토피에 나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식탁에 반영하기 | 모유를 먹이는 경우, 엄마도 아토피 금기 음식은 금물
모유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아토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유에는 알레르기로부터 아이를 지켜 주는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유에는 기름기가 많기 때문에 이 역시 과산화지질을 만들 수 있다. 모유를 먹일 때 주의할 것은 엄마가 아토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모유는 엄마의 영양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엄마가 아토피 금기 음식을 먹는 것은 바로 아기가 먹는 것이나 다름없다. 흔히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를 위해 산양유를 먹이기도 하는데 이 또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특수분유를 먹이는 편이 낫다. 젖을 뗀 아기에게는 콩 알레르기가 없는 경우라면 생우유보다는 두유를 권할 만하다.


100℃ 이상에서 튀기거나 구운 밀가루 음식은 먹이지 않는다
 
밀가루로 만든 과자를 너무 많이 먹이면 안 된다. 밀가루 자체가 아토피에 무리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과자가 엄청난 농약을 살포해 키운 밀로 가루를 만든 뒤 표백제와 방부제까지 넣는 수입 밀가루를 사용하기 때문에 아토피를 가진 아이에게 독소로 작용할 수 있다. 더욱이 과자류를 만드는 과정도 대개 100℃ 이상에서 튀기거나 굽는 것이고, 맛이나 향, 촉감 등을 개선하기 위해 넣은 여러 가지 식품첨가물이 아토피 증상을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포테토칩 같은 스낵, 비스킷, 피자 등은 아토피성 아이의 간식으로는 적당치 않다.

식탁에 반영하기 | 우리 밀로 만든 통밀빵이나 찹쌀을 넣지 않은 전통음식을 먹인다
아토피가 있는 아이에게는 번거롭더라도 간식을 직접 만들어 주는 것이 좋다.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 밤, 단호박, 껍질콩, 유정란 등은 쪄서 먹일 수 있으므로 준비하기에도 손쉬운 간식들이다. 여기에 빵이나 떡을 만들어 먹여도 좋다. 흔히 빵과 떡은 아토피의 금기 음식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빵이라도 우리 밀로 만든 통밀빵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적다. 떡 중에서도 아토피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찰떡이다. 찰떡을 만드는 찹쌀은 가려움증을 유발하는 히스타민 계통의 물질을 분비하게 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한방에서도 찹쌀은 열이 많은 음식이기 때문에 열이 원인이 되는 아토피에는 좋지 않다고 여긴다. 따라서 멥쌀로 만든 떡이라면 걱정하지 않고 먹여도 된다.


‘아토피에 좋은 현미와 초록색 해초류?’, 하지만 먹어선 안 될 식품

아토피 식이요법 상식 중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현미와 초록색 해초류를 먹이는 것이다. 벼를 수확해서 겉껍질만 벗기고 쌀겨와 씨눈을 남긴 것이 바로 현미인데, 쌀겨와 씨눈에는 중금속을 해독할 수 있고 항암작용도 뛰어난 성분이 들어 있어서 그 자체로는 매우 영양가가 많은 식품이다. 하지만 일반 백미도 소화를 제대로 시키지 못하는 아토피의 경우 몸에 좋은 현미를 먹는다 해도 그것을 소화흡수할 능력이 부족하다. 오히려 현미에는 찹쌀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히스타민 계통의 물질을 분비하게 하는 성분이 들어 있어 가려움증을 증폭시킬 따름이다.
현미와 함께 초록색을 띤 해초류도 먹이지 않는 것이 좋은데, 초록색 해초류에 많이 들어 있는 클로렐라라는 단백질 성분이 몸 안에서 활성산소를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파래와 청각 등을 들 수 있다.

식탁에 반영하기 | 다시마·미역·녹미채 등의 갈조류를 먹인다


우리 몸에 세포막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면역반응을 일으키며 각종 호르몬의 합성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지방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동물성 기름은 활성산소와 함께 과산화지질을 만들어 아토피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대신 채소와 해조류, 생선을 통해 필수지방산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채소류를 먹일 때는 주로 제철 채소를 먹이되 고사리와 죽순은 피한다. 해조류 중에서는 녹조류를 제외한 다시마나 미역, 녹미채 등을 먹이는 것이 좋고, 게나 새우, 조개류, 흰살 생선, 뼈째 먹는 작은 물고기 등을 섭취하는 것도 권할 만하다. 하지만 등 푸른 생선이나 장어는 먹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고등어나 꽁치, 정어리, 참치 속에 함유된 DHA 성분이 가려움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