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에서 명조와 청조는 어떤 위치에 있는 시대였던가? 흔히 ‘명청시대(明淸時代)’로 함께 부르지만 한(漢)민족 단일국가인 명조와, 만주족이 세우고 다민족 복합국가인 청조의 두 왕조는 연속성과 단절성(혹은 공통성과 이질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100년에 가까운 원(元)의 지배를 종식시키고 한족의 왕조를 부활시키면서 등장한 명조(明朝)는, 개국 초 몽골지배의 잔재를 청산하고 유교이념에 기반을 둔 한민족의 중화문화를 부흥하는데 진력하였다. 송대에 성립된 중앙집권적인 황제독재체제제는 명대에 와서 한층 더 정비되고 강화되었다. 명 후기부터 수공업과 상업의 발달, 화폐경제.상품경제의 광범한 보급 등으로 중화제국은 완숙기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왕조말기가 되자 내부적으로 각종 반란이 빈발하여 그 중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어 명이 멸망하였다. 이런 혼란을 틈타 만주 일대에서 부족을 통합하고 급속히 세력을 키우고 있던 만주족의 청(淸)이 중국에 진격하였고, 결국 반란세력과 명조부흥[복명: 復明]세력을 일소하여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복왕조가 되었다. 명조와 청조의 외형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통치영역의 범위와 민족구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명조의 지배 영역은 한.당조(漢.唐朝)와 같은 전통적인 한족 왕조의 지배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명조는 민족구성에서도 소수 이민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한민족 단일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청조는 만주, 내.외몽골, 티벳[서장: 西藏], 동투르키스탄[신강: 新疆]의 주변 이민족의 영토까지 거의 정복한 광범위한 영역을 지배하였고 따라서 민족구성도 한족 이외에 몽골, 만주, 티벳, 투르크등 여러 민족이 포함된 다민족국가였다. 명조는 몽골족의 이민족지배를 물리치고 농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전형적인 한족국가의 부활을 꾀한 왕조였다. 반면 청조는 이민족인 만주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하고 황제 및 권력의 최상층을 점유한 ‘정복왕조’였을 뿐 아니라 북방 및 중앙아시아 제 민족까지 지배하에 넣은 초강대국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명청시대’로 통칭하기에는 두 왕조의 차이가 너무 대조적이다. 오늘날에도 중국의 학계에서는, 명말에 보였던 각 방면의 눈부신 발전이 만주족의 강압적인 지배 때문에 좌절되고 저지되었다는 ‘단절론’을 주장하는 학자가 적지 않다. 실제 만주족이 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압도적 우위에 있는 한족을 힘으로 제압하는 과정에서 정복자로서의 강압적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사회발전을 저지한 측면도 적지 않다. 만주족의 생활기반을 보장해 주기 위해 북경 일대의 토지를 강점하면서[권지: 圈地] 수많은 한인들을 변두리로 몰아 내었고, 해상을 무대로 한 항청(抗淸)세력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해안 주민을 강제로 내륙으로 소개시킨 천계령(遷界令)은 해당 주민의 고통은 물론 중국 전체의 사회.경제의 발전을 크게 저해하였다. 수많은 금령(禁令)과 가혹한 옥사(獄事)[문자옥: 文字獄]를 통한 엄격한 사상통제로 청대 지식인의 관심과 학문풍토는 과거(科擧)시험 준비가 아니면 현실의 정치와 생활과는 동떨어진 고증학(考證學)에 몰입되어 학문의 다양한 발전을 저해하였다. <명청시대 남성의 복장, 두발 비교>
이렇듯 명조와 청조간에는 단절과 이질성의 측면도 적지 않으나, 계승.발전과 동질성의 측면도 많다. 청조는 비록 정복왕조였지만 명조를 계승한 정통 중국의 한 왕조로 자처하였다. 문화적 화이관(文化的 華夷觀: 지리적으로 오랑캐 영역에 살던 ‘夷’라도 문화적으로 중화의 수준을 이루면 ‘화(華)’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내세움으로써 지리적.종족적 구분이 중시되었던 전통적 화이관을 이론적.명분적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실제 청조는 주변 이민족을 대부분 통합․정복하여 지배함으로써, ‘중국에 동화하여 황제(천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중화주의적 천하관념을 역대 어느 왕조보다 잘 구현한 왕조이기도 했다.
명대에 정비된 각종 제도는 청대에 대부분 계승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특히 명말에 제기된 개혁론이나 실용주의적 경세치용의 학문은 명말의 정치적 혼란과 행정체제의 이완 등으로 거의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다가 청조치하에서 실현된 예도 많다. 이것은 청조의 강력한 통치력과 행정력, 그리고 청조 지배의 중국이 내외적으로 경쟁관계나 위협세력이 없이 장기적인 안정과 성세(盛世)가 지속된 점과 관련이 깊다.
명초 과거제도의 전면적인 시행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신사(紳士)는 명말에 사회의 지배계층으로 성장하여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중국지배에 협조하여 청대에도 계속하여 지배층으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명 중엽부터 크게 발달한 수공업, 상품생산, 상품유통의 활기는 명말청초의 전란으로 타격을 입긴 했으나 청대에 계승.발전하였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오히려 북방민족의 질박한 기풍이 중국사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러 일으키는 역할도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약간의 후퇴와 장애요인은 있을지라도 청조는 전반적으로 걸쳐 명조를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 계승은 ‘질적인 도약’ 혹은 ‘획기적 발전’이라기보다는 명말에 이미 단초가 보이거나 형태가 갖추어진 것이 사회전반, 혹은 광범한 지역으로 전파.보급되는 ‘양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명청시대는 흔히 ‘제국질서가 완성된 시대’, 혹은 ‘난숙한 중화제국’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전술한 명.청 두 왕조의 계승.발전관계를 전제로 한 것임과 동시에 서구의 침략과 내부적 변혁이 일어난 근대 이전의 ‘전통시대의 마지막 시기’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중국의 근대화과정의 성패와 그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서구의 충격’론과 ‘근대화’론이 풍미한 가운데, 중국 내부의 자생적 발전에 대한 가능성이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었을 때 그 대상시기가 바로 명청시대였다.
한편 명청시대는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 월남, 일본 등이 책봉과 조공의 관계로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는 ‘동아시아 질서’가 완비를 보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명대에 동아시아 중심의 세계는 청대에 들어 중앙아시아, 티벳, 내외 몽골, 동북의 만주 등의 주변 민족을 통치영역에 포함시키면서 영역의 급속한 확대를 보였다. 명말에는 유럽인(초기에는 주로 선교사)이 도래해 오면서 중국이 제한적이나마 이질문명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선교사들이 전파하고자 한 기독교는 중국인의 종교적 흥미를 별로 끌지 못했으나 그들이 함께 전래한 서양의 기술문명은 ‘서학(西學)’이라 하여 명말청초의 중국 지식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같은 시기에 보급되기 시작한 신대륙작물(옥수수, 고구마, 감자, 담배, 땅콩 등)은 구황식물로서, 혹은 중국내 개척지의 유력한 작물로서 급속히 보급되어 중국인의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고 인구의 이주와 급속한 증가에도 기여하였다.
19세기 중엽 이래 중국이 서구세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개방되고 침탈을 받으면서 근대 중국의 역사를 서구적 기준이나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많았다. 이에 따르면, 중국의 근대는 ‘서구의 충격’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되었고 그 때의 ‘근대화’는 서구의 기술문명을 배워 부국강병과 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개혁에 실패하자 제국주의의 침략이 본격화되어 반(半)식민지 상태가 되었으며, 그 후 중국은 반제.반봉건(反帝.反封建)의 혁명과제를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창출하는 것이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종래 중국 근.현대사 연구는 서구(의 침탈)와 관련이 있는 부분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경향을 반성하면서, 중국사회의 구조적 특질 및 그 고유한 전통의 계승.발전의 측면에 주목하고자 하는 연구경향이 대두하였다. 그 기준이 서구적인 가치이든 중국 고유의 전통이든 중국 근현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변혁 이전의 전통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런 의미에서 전통사회의 특질이 완결되고 서구의 진출이 본격화되기 직전의 사회인 명청시대(明淸時代)에 대한 연구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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