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전쟁: 프랑스 ‘과거청산’의 지적(知的) 계보와 구조
노서경
머리말
알제리전쟁(1954-1962)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다.1) 막강한 해외 제국을 통치하는 서구 강대국과 그 힘과 논리에 종속되어 한 세기 이상 철저히 지배당한 약소민족 사이의 전면적인 대결이 알제리전쟁이었다.2) 그 전쟁은 전 날의 제국(帝國)인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1950년대 중반의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하고, 비효율적인 기존의 제도를 버리고 근대화 작업에 나서야 했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그 전쟁은 전쟁이 벌어지게 된 경위와 전쟁 자체가 지닌 모순으로 인해 모든 국제정치와 모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원천적인 문제를 프랑스 사회에 제기했다. 알제리는 영국, 프랑스가 19세기부터 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거느렸던 여러 지역의 여러 유형의 식민지들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식민 지배세력에 의해 완전히 통합을 당해 이미 1848년 제2공화정기에 프랑스의 해외 도(道)로 전락한 존재였다.3) 따라서 1789년 혁명 이래 인간애와 보편주의를 주창해 온 프랑스 지식인은 인종과 종교와 문명이 다른 민족을 마치 브르타뉴와 알자스-로렌과 마찬가지인 듯 소유하고, 그 소유에 집착하는 현실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피해가기 어려웠다. 전쟁은 카빌(Kabyle)의 산악과 사하라 사막과 알제의 카스바(Casbah)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식민주의라는 서구 문명의 비이성적 원천이 지금 문제시되고 있음을 일군의 좌파 지식인들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4) 알제리전쟁에서 소수이나 예리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자기 나라의 교전(交戰) 상대인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는 어쩌면 기이한 현상은 이러한 자의식에서 비롯되었다.5)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의 반전 여론이 격앙되었고 미국 신문의 논필이 대단히 비판적이었어도 베트콩을 직접 지원하는 미국 지식인들의 행위와 언설은 있을 수 없었던 것과 비교를 해보면6)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알제리 사이에 상당히 특수한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프랑스 지식인과 알제리전쟁의 미묘한 밀착 관계는 1962년 종전으로 끝나지 않은 사실이다. 그 관계는 30년 또는 40년의 시간을 넘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에 지난날 보다 훨씬 확장된 형태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2000년 6월, 르몽드에서 한 알제리 여성이 전쟁기에 고문당한 것을 취재하여 보도한 것이 불씨가 되어 지난 수년간 알제리전쟁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가 프랑스 신문과 방송, 화면을 덮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한 다양한 증언과 회상이 마치 봇물처럼 터졌고 이로써 프랑스 사회가 어떠한 주제들을 청산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1차 연도의 주제로 살폈다. 참전 장병들의 심적인 부담, 프랑스군에 복무한 알제리인인 하르키와 그들의 후손들이 겪어온 갈등과 수난, 1961년 10월 17일 파리 시내에서 북아프리카인을 상대로 무차별하게 행사되는 공권력의 폭력 행위와 국가적 개입에 대한 논란, 알제리 민족해방의 실체인 FLN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부가 모두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이 모든 논의는 결국 식민주의로 인해 벌어진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성찰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 잠정적인 결론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국가는 그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알제리전쟁에 대해 어떠한 종류의 청산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방식에 의존할 문제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역사의 작업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7) 사실 2000년도 여름부터 직접 쟁점이 된 것은 전쟁기에 프랑스군이 자행한 고문이었으며8) 전쟁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것은 별로 아니다. 그렇더라도 어떻든 식민 통치에서 일어난 물리적이고 제도적인 가해와 피해의 절정이자 결산이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청산 작업이 프랑스 지식인들의 몫으로 양도된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의 정치와 프랑스의 지식인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착되어 있다는 미국 역사가 토니 쥬트의 명제의 적합성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대목이다.9) 2000년, 의회에 조사위를 설치하여 알제리전쟁에서 자행된 고문 행위를 재검토하자는 공산당 안이 부결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러한 일시적 조사보다는 역사적이며 학구적인 작업을 통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프랑스와 알제리 양자의 선린 관계를 위해 보다 근본적이며 우선한다는 설명이었다.10) 이는 비시(Vichy) 정부 아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은 사안에 대해 프랑스 정부가 사과한 것과는 거리가 먼 태도이며 따라서 당연시하기보다 마땅히 따져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그러한 규명을 위해서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알제리전쟁의 지적 청산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이 현상은 어떠한 계보를 갖고 있는가 하는 부분이다. 또한 문제가 프랑스 내부에서만 발생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지중해 넘어 알제리에 결부된 만큼11) 이러한 지적 담론을 내어 놓는 현실적이며 사회적인 구조를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지식이 얼마큼 사회의 반영인가, 아니면 반영이기보다 사회를 끌고 가는 것이 지식인가 하는 사회학자 아마드 사드리의 질문은 과거청산의 영역에 동원되어도 긴요하게쓰일 것이다.12)
1. 1950년대의 비판과 항의
이미 1952년에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북아프리카의 행진?에서 설명했고 다시 2차 세계대전 전쟁기의 상황만 별도로 연구되었듯이13) 북아프리카 민족주의는 2차대전의 참전을 통해 대내외적으로 분명하게 대두했다. 알제리도 인구의 10분의 1인 유럽계가 토지와 생산 이윤의 절대 가치를 점령하도록 하고 10분의 9인 모슬렘은 법적으로 하등 인간 취급을 해 온 프랑스의 식민 정책이 변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했다. 그들은 식민 종주국에 대해 일방적인 선의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군단의 피와 희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14) 그러나 1945년 5월 8일 세티프(S?tif) 시위에 대한 대규모의 진압작전이 말해주듯이 프랑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알제리 민중을 위한 쇄신책을 적용할 의사도 별로 없었고 지배에 물든 프랑스-알제리들의 사고방식을 흔들어 놓을 묘책도 없었다. 프랑스 국가의 입장에서나 일반적인 프랑스인들의 심성으로는 알제리가 별개의 독립된 민족이라는 개념은 오직 프랑스를 훼손하고 음해하는 반국가적 발상이었다. 문명의 나라인 프랑스의 문화와 가치관에 동화되는 길만이 19세기에나 20세기에나 여전히 알제리인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조건이고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반식민주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1950년대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에서 어떠한 지식인이라도 쉽게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15) 그 때문에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한 19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의 반식민주의적인 진술은 1950년대에 보아도 과감했고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알제리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의 계보는 1930년대를 지나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비가시적인 형태로 분명하게 형성되어 갔다.16) 2차대전 이후에도 파리 중심의 주류 지식인 사회에서 알제리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드물었고 1945년 세티프 봉기와 이에 대한 프랑스군의 진압작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식자층은 거의 감지하지 못했다.17) 오히려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비판이 먼저 일어난 것은 피에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알제리 현지의 사회계층 내부였다. 일부의 피에 누아르 지식인들은 어려서부터 직접 모슬렘들을 만나고 그들이 당하는 착취와 대가 없는 노동을 목격하고 또한 그들의 품격을 접하면서 모슬렘 문화의 가치를 인정하고 성장했다. 소설과 에세이뿐 아니라 콩바(Combat)지를 통해 알제리를 부단하게 의식한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그러한 예로서 널리 알려진 경우이며 그러한 유형의 지식인은 카뮈 혼자일 리가 없었다. 예를 들어 작가 쥴 루아, 역사가 샤를-앙드레 쥴리앙이 전쟁 전과 전쟁기 내내 연구와 저술로 알제리 문제를 제기했다. 1954년 11월 1일 FLN 테러로 시작해서 1955년 프랑스 병력의 투입이 확대되고 1956년 2월 비상전권(Pouvoirs sp?ciaux)이 거의 만장일치로 본국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전쟁이 확실시되자 동시에 본국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긴급한 현안으로 알제리 정치범과 민주 인사들의 석방, 민주화를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해 알제리 민족운동의 거두 메살리 하지(Messali Hadj)의 감금을 해제하고 알제리에 민주화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하는 운동에는 다양한 계열이 모였다. 이를 가리켜 제3세계주의(le tiers-mondisme)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 시기의 진보 지식인들이 새로운 문제인 약소국의 현실, 그들과 야소민족의 관계에 눈뜨면서 제시한 개념이었다.18) 클로드 리오쥐에 의하면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은 직접적으로는 1945년 이후 형성되어도 이미 2차대전 이전에 공산당과 노조, 대학생들의 운동이 모두 식민지 문제에 주목했다.19) 알제리전쟁에 대한 1950년대의 비판적인 지식인 세계는 이처럼 일정한 노선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닌, 개인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이 짙었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앙드레 망두즈, 루이 마시뇽, 앙리 마루 같은 인사들처럼 가톨릭 지식인들이 전쟁 초기부터 시작하여 전쟁 이후까지 일관된 자세로 식민지의 현실을 분석하고 전쟁의 모순을 파헤친 것이었다.20) 프랑시스 장송망(網)은 좌파 지식인들이 FLN을 공개적으로 지원하여 재판을 받은 유명한 사건이지만 기독교 사제들이 전쟁에 반대하고 장송망을 지원하는 것은 신자가 아닌 가담자들에게도 안도감을 주었다. 알제리전쟁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가톨릭만이 아니어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역할도 중요했다.21) 그러나 1958년 취임과 함께 알제리 독립의 방침을 취하는 드골 정부에 대해 폭력 행사로 맞선 OAS의 행태에서 보듯이 1950년대 지식인들의 식민주의에 대한 반발과 비난은 강력한 극우의 적수를 만났다. 그것은 더구나 일반의 무관심에 포위된 외로운 소수였다.
2. 1990년대와 1950년대의 연속성과 변화
2000년 10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뤼마니테에 나타난 12인 선언은 40년의 시간이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알제리전쟁에 대한 항의의 정신이 당시의 당사자들에게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12인 선언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며 거의 금기시되었던 알제리전쟁에 대한 논의가 갑자기 활기를 띤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그들의 비판의 정신이 연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그것은 도구와 장치를 만나야 했다. 근래 수년간 수없이 쏟아져 나온 알제리전쟁에 대한 보도와 논평, 증언은 분명히 르몽드와 리베라씨옹, 뤼마니테 같은 좌파 언론이 주도했고 여기에 방송과 텔레비전이 영상을 통한 계속적인 보도로 대중의 감수성을 자극했다.22) 그러나 르몽드도 뤼마니테도 1950년대의 계승이란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따라서 지식인의 주장과 그 표현의 매체 양면에서 1990년대와 1950년대에 어더한 연속성이 놓여 있느냐 하는 문제를 자세히 살펴야 할 필요가 있다. 필경은 인간의 권리라는 프랑스에서는 매우 오래된, 그러나 근래에 새롭게 강조되는 이념이 그러한 연속성의 중심에 있을 것이다.23)
하지만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에 관한 논의는 프랑스 지식층만의 독점적인 논의를 벗어났다.24) 1950년대에도 물론 알제리의 작가와 신문기자, 시인, 연극인들이 피식민지의 질곡에 갇혀 배우지 못하고 헐벗은 알제리 민중의 대의를 대변했다. 장 암루슈는 정복자가 과시하는 순전히 우발적인 우수성 앞에서 그것이 천성적인 우수성인 듯 굴복하는 피지배자의 의식이 계속되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25) 그러나 고급 두뇌를 키워내기가 어려웠던 전쟁기에 비해 1970-80년대 북아프리카의 지적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활발해졌다.26) 문학과 사회학, 인류학 또 역사학 등 거의 모든 인문 사회분야에서 아랍 세계와도 다른 북아프리카의 독특한 풍토와 역사, 현실이 분석 규명되고 있다.27) 남아메리카 문학의 전성기에 이어 마그레브 문학은 1980년대부터 불어권 문화에 유럽인의 의식과 세계에서는 찾지 못할 풍성함을 공급하게 되었다. 벤 젤루운 같은 영향력 있는 대중 평론가와 타사디트 야신 같은 언어 인류학자의 활동은 알제리 전쟁기의 거장 작가들을 의식적으로 계승하면서 한편으로 자신과 동족(同族)이 속한 지식인과 민중의 심적이고 실질적인 어려움을 파고들고 대변하고 있다.28)
물론 이러한 지적인 작업을 통해서도 프랑스의 알제리 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착오에 가깝다. 자크 마르세유에서 보듯이 알제리에서 식민 모국인 프랑스가 이룩한 것에 대해 프랑스 지식인들이 잘못이 많았다고 회개(repentance)하는 것은 아니다.29) ?식민주의 흑서?를 간행한 마르크 페로 같은 역사가는 프랑스 사회에서 식민 통치에 대해 지금 회개하고 있다고 하지만30) 그것은 극히 일부 연구자들에 한정된 역사의식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식민지 시기와 전쟁기 또 그 이후에도 알제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고려하지 않던 식민주의적 인식은 1990년대에 통하지 않게 되었다. “알제리는 하나의 민족(nation)”이라는 제목을 붙인 기사가 나오는 것이 1956년이었고31) 어쩌면 기이한 이 기사의 제목은 그만큼 알제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은 프랑스에 의해 부인되고 있던 사실을 반증한다. 샤를- 앙드레 쥴리앙은 이 기사에서 민족을 형성하는 자연스러운 의식과 공동운명체의 감각을 알제리인들은 획득했고 이를 집요하게 부정하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규정해야 했다.32) 알제리전쟁에 대해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는 1970-80년대에도 그러한 인식은 거의 당연시되었다. 이에 비해 1990년대 이후 프랑스 지식인의 담론과 사회의 인식에서 그같은 알제리 민족에 대한 부정은 사라졌다. “프랑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재판”을 알제리 역사가는 당당히 서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날이 오기까지에는33) 사실은 알제리의 민중, 또 프랑스로 건너와서 하층노동에 종사해야만 했던 수많은 삶이 있었다.
3. 이민자 도시빈민과 지식인
왜 이민 노동자라는 사회적 문제가 알제리전쟁 청산이라는 제한된 주제와 연결되어야만 하는가. 알제리인인 사회학자, 압델말레크 사야드는 여기에 명료하게 답을 내놓고 있다. 이민자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의 연장이다.34) 1990년대 중반에 프랑스의 알제리 이민자는 60만명이 넘고 이 공식 숫자에 1947년부터 1962년까지 프랑스인으로 등록된 알제리인을 포함하면 1백만 명이 된다. 이미 1차세계대전이후로는 프랑스 노동력의 필수적 요소인 이민 노동자는 전체 인구의 7%이며 그 중에서 포르투갈인을 제외하면 알제리인의 비중이 가장 높다. 인구가 계속 급증하고 반면 취업의 가능성은 약한 알제리의 사회 현실이 사람들을 계속 몰아내고 있고 그들이 갈 곳은 프랑스이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상존한 낭테르 빈민촌의 상태는 벗어났다. 프랑스 정부는 파리 교외 보비니(Bobigny)와 누아지(Noisy)에도 일정한 기준의 주거와 공동체의 설비와 최소의 문화를 마련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민자 문제는 프랑스 지식인이거나 알제리 지식인이거나 날이 갈수록 생각하게 되는 암적 현실이다.35) 유럽인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유럽중심주의, “나의” 역사만이 역사라는 사고의 기반이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로운가를 알제리와 흑인과 유색인 이민자들은 정시하도록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36) 그들은 프랑스 사회에 순종하고 동화되려고 하며 공격을 받지 않으려고 하지 눈에 띠고 구분되려고 하지 않는다.37) 그런데 극우적 세력이 혐오스러워 하는 것은 바로 그들도 우리와 같을 수 있다는 모습이다. 산업계의 조건과 사회구조 양면에서 이민 노동자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러나 그들이 통합(int?gration 이 말은 식민지 시기의 동화assimilation에 대체해서 등장했다)되는 것도, 통합되지 않는 것도 모두 문제인 구조이다.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서도 때로는 거의 불가능한 정도의 투쟁을 기울여야 하는 이민자 세계는 식민주의의 과거이며 현재이다. 알제리전쟁이라는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내 곁에 있는 지난 날 식민지인들이었다.38)
4. 1990년대 알제리 폭력에 대한 지식인의 대결
이에 더해 1992년부터 알제리에서 일어난 격심한 정치적 폭력은39) 지중해 양안의 지식인의 의식을 날카롭게 무장하도록 촉구했다. 유일정당에서 복수정당의 정치체제로, 군부 중심에서 민간 정치로 이행하려는 국가 건설이 세계적으로 드문 유혈을 빚고 있는 1990년대 알제리 사태에 대해 이 자리에서 성격을 규정하려는 것은 아니다.40) 종교와 정치의 분리가 근대화의 조건이라면 그러한 근대화는 거부하려는 이슬람 노선에 대해41) 민주주의 세력이 좌절하고 무참한 살해와 고문을 당하고, 무고한 주민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알제리 국가의 불투명한 입장과 대응 폭력의 문제 역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알제리 사태는 프랑스에서는 강 건너 불이 아니었다. 알제리인들이 이 가공할 폭력을 피해 안전한 장소를 찾을 곳은 프랑스뿐이고 이와 함께 알제리의 이념적 폭력이 곧바로 프랑스 땅으로 건너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러한 현실적인 위기감과 알제리의 자원을 의식해야 하는 프랑스의 경제적 이해가 90년대의 상황을 q상하게 주목하도록 이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었다.
타사디트 야신은 이 폭력이 당대에 형성된 폭력이 아니라 발생학적인 계보를 갖고 있다고 식민지 시대와의 연결을 제기했다.42) 그것은 인류학자인 타사디트 야신의 독단적인 견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1990년대는 FLN의 내적 구조도 다시 보도록 이끌었고43) 반대로 알제리 민족주의에 대한 연구도 강성하게 만들었다. 민족주의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식민주의와 떨어져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이어져 온 흐름이지만 1990년대에 알제리의 도는 알제리 출신의 수많은 젊은 자가와 사회이론가들이 배출된 것은 폭력 앞에서 아연하기를 거부하고 이를 직시하려는 의지의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반대로 이러한 지적 각성에 대응하여 분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알제리역사와 정치에 관한 참고문헌을 의도적으로 출간하면서 그들은 위기에 대해 이렇게 대면하고 대결하자고 제언했다.
맺음말
알제리전쟁을 주제로 한 프랑스의 과거청산 방식이나 양상은 사법적이거나 정치적이라기보다 분명히 지적인 성격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국가의 소극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지만 정치적인 방법만으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시사한다. 폴 리쾨르가 명료하게 말하듯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수난에 대해 방관하지 않는 지식인의 자세가 밑거름이었으며 또한 희생자와 사회 사이의 연대이며 다리였다. 적이 사방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알제리전쟁을 문제삼는 것은 당시에는 메아리 없는 외침 같았다. 사회당, 공산당, 노조, 공화좌파 그리고 일반국민 사이에서는 물론이며-지식인 내에서도 그들의 비판은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언과 행동은 다음 세대에 의미 있는 유산으로 남았고 후대는 앞서간 지식인들의 외로웠던 투쟁을 계승하고 확대했다. 1990년대의 알제리전쟁 논의는 이 소수의 지식인들로부터 상속받은 바가 있고 그러한 증거를 어떠한 도구와 수단으로 찾아낼 것인가는 앞으로의 과제이다. 하지만 이렇게 긍정적인 평가만으로 그치게 되지는 않는다. 사회의 기층 노동은 이민자들에게 떠넘기고 많은 젊은이들을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희망 없는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알제리전쟁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심각한 부정의는 양상을 달리하여 확대되고 있고 지식인들은 이 서구 백인 문명의 깊은 모순을 의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알제리에 대한 이러한 결산이라면 결산은 프랑스의 헤게모니의 유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직접적인 식민 지배 방식이 퇴조했어도 프랑코폰(francophone)이라는 유연한 개념을 창출하여 강력한 지적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국가의 존재는 충분히 살아남았다.44)
<출처: 역사와 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1) 프랑스는 알제리전쟁에 전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지 않고 전쟁 발발 후 40여 년 간 공식적으로는 질서유지작전이라고 불렀다. 이 명칭의 문제와 역사는 그 전쟁이 얼마나 착잡하고 양자 사이에 괴리감이 깊었는가를 말해주는 직접적인 증거일 것이다. 1999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 의회는 알제리전쟁이라는 이름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된다. 2) 영국 역사가 마이클 케틀은, 프랑스인은 누구라도 알제리전쟁에 대한 공정한 역사를 쓸 수 없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알제리전쟁사로는 다음의 저술을 들 수 있다. Alistair Horne, Algerian War, Michael Kettle, De Gaulle and Algeria, 1940-1960, Quartet Books ; Hartmut Elsenhans, La IVe R?publique et la guerre d’Alg?rie(traduit), 3) 그러나 1830년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이 시작된 이래 에미르 압델-카데르를 지도자로 알제리의 주요한 전사(戰士) 부족들은 50년간 항쟁을 지속했으며 이러한 19세기 역사는 최근 알제리에 있는 알제리 역사가들에 의해 특히 주목받고 있다. 4) 대표적으로 Jean-Paul Sartre, Situation VI; Raymond Aron, La trag?die alg?rienne; Albert Camus, Chronologe alg?rienne. 5) 사르트르와 함께 ?현대?지를 편집한 프랑시스 장송과 수십 명의 지식인, 노동운동가, 예술인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FLN의 자금 운반책이 되고 요원들의 도피처를 제공하고 여권을 위조하는 활동을 벌였다. 당시의 경위와 가담자들의 회고는 Francis Jeanson, Alg?rie hors la loi; Jacques Charby, Les porteurs d’espoir, La d?couverte, 2004. 6) 베트남전쟁기의 미국과 알제리전쟁기의 프랑스 학계 및 언론을 비교한 미국 학위논문. 7) 2000년 10월 뤼마니테에 발표된 12인 선언 8) 고문 문제에 대해서는 특히 Hafid Keramine, La pacification, Livre noir de six ann?es de guerre en Algerie, La cit? ?diteur, Lausanne, 1960. 전체에 주목하게 된다. 9) Tony Judt, Past imperfect. French Intellectuals, 1944-1956,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2. 10) Ecrire l’histoire commune par Fran?ois Loncle, Pr?sident de la commission des Affaires ?trang?res de l’Assembl?e nationale, Lib?ration, mardi 24 juillet 2001. 11) 프랑스와 알제리 두 사회의 문제이지만 어떻게 보면 세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파리 중심의 비판적 지식인 세계가 있고 알제리 자체에서 양성되어 프랑스의 사조에 휩쓸리지 않고 독자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와 언론인, 문학가들이 있고 그런가하면 액스앙프로방스와 마르세유 등 남부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와 알제리를 여전히 별개이기 보다 하나인 듯 간주하는 관점이 유력하다. 12) Ahmad Sadri, Max Weber’s Sociology of Intellectuals, Oxford University Press, 1992, pp.33-37. 13) Charles-Andr? Julien, L’Afrique du nord en marche, Alg?rie-Tunisie-Maroc 1880-1962, Omnibus, 2002, pp.235-292; Christine L?visse-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Albin Michel, 1998. 14) 이러한 전쟁과 민족주의의 상호 영향은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긴밀하게 보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Gilbert Meynier의 노작을 보라. Alg?rie r?v?l?e, La guerre de 1914-1918 et le premier quart 여 XXe 냗칟, Geneve, Librarie Droz, 1981. 15) 프란츠 파농의 저서에 서문을 쓰고 또 “프랑스는 알제리에 대해 소유한 것이 없으므로 상실할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르트르의 경우는 예외적이다. 16) 연합군이 알제리 해안을 지중해 작전의 거점으로 정했고 드골의 자유 프랑스군이 역시 알제리 병력을 비롯한 아프리카 군단에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모슬렘 알제리인들은 2차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그들의 권리 신장에 획기적 변화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C. L.-Touz?, L’Afrique du Nord dans la guerre 1939-1945, pp. 332-357. 17) Setif 봉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Annie Rey-Goldzeiger, Aux origines de la guerre d’Alg?rie 1940-1945, La d?couverte, 2002. 18) Jean-Pierre Biondi, Les anticolonialistes(1881-1962), Robert Laffont. 19) Claude Liaizu, Aux origines des tiers-mondisme, L’Harmattan, 1982. 20) Andr? Mandouze, France Observateur, 1959. “진실로 조국을 배신하는 자는 누구인가”하고 그는 그를 배신자로 비난하는 측에 반문한다. 21) Geoffrey Adams, The Call of Conscience. French Protestant Responses to the Algerian War, 1954-1962, Wilfred Laurier University Press(Canada), 1998; Ren?e B?darida, La gauche chr?tienne et la guerre d’Alg?ire, in La guerre d’Alg?rie et les chr?tiens, Cahiers de l’IHTP, 9, octobre 1988. sous la direction de Fran?ois B?darida et Etienne Fouilloux 22) 알제리전쟁의 영상화에 대한 연구는 1990년대에 이미 미국에서 나왔고(Philip Dine, Images of the Algerian War, French Fiction and Film, 1954-1992, Clarendon Press, Oxford, 1994). 프랑스 대학의 미간행 학위논문들도 이 분야를 다루었다. 23) 2004년에 새로 편집 간행된 Les droits de l’homme를 보라. 24) 일간지 르몽드에 의해 2000년에 촉발되어 알제리전쟁 50년이 되는 2004년에 와서는 여러 부문에 걸친 연구들이 일대 정리 단계로 접어들었다. Philip Bourdel, Le livre noir de la guerre d’Alg?rie, Fran?ais et Alg?riens 1945-1962, Plon, 2003; Mohammed Harbi, Benjamin Stora, La guerre d’Alg?rie 1954-2004 la fin de l’amn?sie, Robert Laffont, 2004; M. Harbi, Gilbert Meynier, Le FLN documents et historire 1954-1962, Fayard, 2004. 25) Jean El-Mouhoub Amrouche, Un Alg?rien s’adresse aux Fran?ais ou l’histoire d’Alg?rie par les textes(1943-1961), ?dition ?tablie par Tassadit Yacine, Awal/L’Harmattan, 1984. 26) 아랍 세계 전반에 걸쳐 대학생의 양적 증가와 학위 소유자가 대폭 늘었고 오히려 이들 고급인력의 유럽과 미국 이전이 문제이다. The Arab Brain Drain, ed. by A.B. Zahlan, Ithaca Press, London, 1981. 27) 이민문제와 인권문제에서 활동하고 있는 드리스 엘 야자미는 마그레브 지식인의 주요한 잡지로, AWAL, Confluences, Horizons Maghrebins을 소개한다. 파리의 L’Harmattan 출판사, 남불의 Acte du sud 출판사 등에서 북아프리카 저술의 간행에 집중하고 있다. 28) 영어로도 번역된 Tahar Ben Jelloun, Hospitalit? fran?aise, Racisme et immigration maghr?bine, Editions du Seuil, 1997(1984); T. Yacine-Titouh, Chacal ou la ruse des domin?s aux origines du malaise culturel des intellectuels alg?riens, La d?couverte, 2001. 29) 마르세유는 풍부한 화보 자료를 동원한 프랑스와 알제리의 서문에서 지리와 역사가 프랑스와 알제리가 협력하도록 운명지었다는 말로 양자의 관계에 대한 서술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말을 하는 것은 19세기의 프랑스인이 아니라 민족해방군(ALN)의 사령관이었고 알제리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부메디엔(Houari Boumedienne)이었음을 상기하고 알제리에 대해 향수도 만족감도 버리고 또한 회개의식도 없이 실체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Fran?ais et Alg?rie, sous la direction de Jacques Marseille, Larousse, 2002, Pr?face. 30) Marc Ferro, Le livre noir du colonialisme, 2003. 31) Charles-Andr? Julien, Une pens?e anticoloniale, Positions, 1914-1979, Sindbad, 1980. "L’Alg?rie est une nation", Demain 26 avril 1956, 재수록. 32) C-A. Julien, 같은 기사. 33) OUAR Larbi, Le proces de l’imperialisme et de colonialisme francais, L’Algerie, bastion de la resistance, Entreprise nationale 여 Livre(Alger), 1986. 34)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suivi de l’entretien de Hassan Arfaoui, Editions Bouchene, 2002, p. 102 35) Alain Gillette, Abdelmalek Sayad, L’immigration alg?rienne en France, 36) Abdelmalek Sayad, Histoire et recherche identitaire, p.33. 37) T. Ben Jelloun, Hospitalite fran?aise. 38) Sujet et citoyennet?, Maghreb/Europe, Cahiers Intersignes, n° 8-9 automne 1994. 39) 많은 기록과 증언 중에서 예를 들면 화보집인 Michael von Graffenried, Journal d’Algerie 1991-2001, Editions Autrement, 2003. 40) 알제리의 국가 건설과 이념의 문제, 1990년대 상황에 대해 William B. Quandt, Between Ballots and Bullets, Algeria’s Transition from Authoritarianism, Brookings Institution Press, 1998; Rachid Tlemcani, State and Revolution in Algeria, Westview Press, Colorado, 1986; Kay Adamson, Algeria, A Study in Competing Ideologies, Cassel, London & New York, 1998. 41) 그러나 FIS의 강경노선만이 이슬람 세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온건 개혁주의의 이슬람도 존재한다. 42) Tassadit Yacine, Is a Genealogy of Violence Possible?, Research of African Literature 30 no3, Fall 1999, pp.23-35. 43) G. Meynier, Histoire interieure du FLN 1954-1962, Fayard, 2002. 45) Alec G. Hargreaves, Mark Mckinnsy(ed.), Post-Colonial Cultures in France(Routledge,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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